아우스띠노 성인은『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뜻을 묻지 않으셨으나 구원하실 때 우리의 동참없이는 하지 않으신다』는 명언을 남기셨다.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는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용서와 은혜이지만 범죄한 인간이 하느님께 돌아가지 않는한 용서치 않으신다. 따라서 죄에서의 회개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덕이며 온전히 인간의 회심에 달려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기다리실 때 인간은 하느님께로 돌아가야한다 (1 고린6,1~2). 마치 탕아나 가출한 자녀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향집으로 돌아가듯、이것이 곧 화해의 원리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새로 만나는 삶이다 (2 고린5、14~21: 에페2,12~19). 이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에페1,3~14: 골로1,15~27)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며 생명이시고(요한 11,25) 그분은 인간의 죄 때문에 희생되시고 부활하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었다. 우리는 범죄할 때마다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하는 것이며 죄의 연대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용서를 청할 때 그분은 주저없이 용서해 주신다. 그분은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만이 아니고 당신을 죽이던 사람들을 용서하시며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루가 23, 34) 그의 이와 같은 죽으심으로 인간은 하느님과 화해되었으며 (2고린5, 21: 로마8、3~4: 이사야 53, 5~12 등)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요한 19, 34:에제47,~12). 죄의 용서가 없이는 구원이 없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 이름으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요한 20,19~23:마태 16,19:18,18) 그리고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 때까지 이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하셨다 (마태 28,18~20).
▨죄의 용서는 교회적이고 성사적으로 이루어져
죄의 성격상 연대성이 있고 표징이 있으므로 그 죄의 연대성이 끊기고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어야 하며 죄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표징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죄사함과 새 생명을 얻는 표지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성사 (성사,유효한 표식) 를 남겨주셨다 (마태16, 13~19:사도1、8~14:9,5 등)
1. 성례성사(聖洗聖事)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느님을 떠나 죽음의 권세 안에 속하게 되었고 자유를 잃게 되었다. 죄의 사슬을 푼다는 것은 이 죽음의 세계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듯이 그를 따라 새로운 삶을 살려는 사람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해야 한다(로마6,1~11).
이것이 바로 세례성사이다. 하느님의 말씀이며 사랑이 육화되었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육화되는 것이 세례의 성사인 것이다. 죄는 하나의 행위만이 아니고 독립된 세력으로 나타나며 사회성과 역사성이 있는 것으로 성사(聖事)를 통해서 죄의 역사성과 연대성을 부수고 새로운 관계 즉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의 일치와 하느님 안에서 이웃과의 형제로서 일치가 이루어지고 (요한17,20~26:에페4,2~6)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 지체(肢體)가 되며 새로운 유대와 소명을 받는 것이다 (1고린12,14). 그 뿐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에 신음하던 피조물과도 화해되어(로마8,18~24) 새로운 희망 안에 살게 되는 것이다. 새 희망과 새 삶의 유대는 세례의 대부모(代父母)를 통해서도 아름답게 표현된다.
2. 고해성사(告解聖事)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에 재상의 기쁨과 희망을 주는 세례만이 아니고 허약한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재생의 은혜를 잃었을 때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자비의 성사까지 마련하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악령을 추출하고 질병을 고쳐주셨듯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고 죄를 용서할 능력을 주셨다 (마르코 16,15~18). 죄의 용서도 일곱 번의 일흔번까지 (마태18,21~22) 즉 필요한만큼 무수히 언제나 용서하여 줄 것을 명하셨다. 교회는 이 위임에 따라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신도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사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위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고 진정한 회개 즉 하느님께로의 귀의가 전제된다.
첫째, 자기의 잘못을 알아내야 하다. 잘못을 모를 때 용서를 받을수 없다. 마치 빛이 없을 때 사물을 볼 수 없듯이 주님의 은총의 빛 없이는 인간이 자기의 잘못을 찾아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 자기의 잘못을 알아낸 만큼 뉘우쳐야 한다. 뉘우침은 후회와 구별된다. 누구나 자기 과거를 후회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뉘우침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기본관계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잃은 은총을 마음으로 아파하는 것이다.
셋째, 진정한 뉘우침에는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치 않겠다는 결심이 따라야 한다. 이때 허약함 때문에 다시 범죄 할 우려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된다. 진실로 뉘우치며 자기가 옳지 않았음과 최선을 다해서 다시는 범죄치 않겠다는 결심이 요청되는 것이다.
넷째, 자기의 잘못을 교회에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믿고 교회에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고백소(告白所)는 상담실이 아니다.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이지만 자비의 은총으로 육화된 사랑의 장소를 등한시 한다면 그는 오만이요, 불신앙이될 것이다. 나병에 걸렸던 시리아의 장수 나아만도 엘리사의 명을 따라 요르단강에서 목욕하여 치유받았다 (2 열왕 5,9~14). 고백은 순수하고 진실해야 하며 모든 중죄는 반드시 고백해야 한다. 사죄(死罪)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재생과 치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죄는 본시 하나이므로 부분적 용서는 있을 수 없다.
다섯째 모든 죄는 사회성과 역사성이 있으므로 죄의 용서가 완성되기 위하여 잘못에 대한 보상(補償)이 이루어져야한다. 보상이 없이는 참된 용서를 받지 못한다(아우구스띠노).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자비의 은총을 받아야하며 성인들의 통공을 힘입어 속죄하게 된다. 고해신부가 주는 보속은 그 자체의 양보다 성사적 의미가 있어 이 통공에 참여하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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