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동구 3국에 있어서 오늘날의 가톨릭교회 모습은 우리교회에도 커다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공산체제 하에서 엄청난 종교 탄압의 압력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탄압을 극복할 만한 계기를 찾지 못하고 타협과 굴종의 길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 이들 3국의 현재의 실상인데, 그러한 결과를 낳은 원인을 단순히 공산주의라는 정치체제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교회자체의 과오도 내재하고 있다.
타협과 굴종의 길
이들 동구권 3국이 1천년이상의 그리스도교 전래역사, 전국민의 30~70%에 달하는 교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나름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채 정치체제에 종속 되여 있는 실상은 같은 공산체제 하에서도 국민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권력과 굳건히 맞서 싸우고 있는 폴란드계 교회와 비교할 때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유럽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유사령, 슬라브 민족으로서의 문화의 동질성,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정치체제의 유사성 등 구체적인 부분에서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체코, 유고헝가리 등 3국은 폴란드와 더불어 전통적으로 동질적인 문화권으로 분류돼 왔다.
그렇다면 이처럼 교세와 역사를 갖춘 동구교회가 오늘날 활력을 잃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나라별로 서로 상이하지만 크게 세 가지의 원인이 있다. 첫째,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으로 전체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공상주의 정권의 탄압, 둘째 유고의 경우 역사적으로 얽혀온 그리스 정교 신자들과의 해묵은 반목, 셋째 체코교회가 극명하게 보여주었듯이 19세기말엽 이래 민족국가 형성과정에서 부정적 영향을 끼쳐온 교회의 과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그리고 여기에다 공산화 이사회 전반적인 자유의 확보를 위한투쟁에 교회가 미온적으로 대처해왔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나치독일의 수중에 놓여있던 이들 3국은 소련군의 진주로 차례차례 공산화의 길을 밟아왔다.
1945년 유고에서, 1949년 체코와 헝가리에서 각각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경제블록인 코메콘(COMECON:동유럽 경제상호원조회의)이 결성되고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이 실시됐다. 전통적으로 농업 국가였던 이 지역을 사회주의 국가 간의 분업화체계로 변화시키려는 의도 하에 소련은 철저한 토지개혁을 통한 농업생산의 집단화, 중공업중심으로의 산업구조변화작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스탈린은 각국의 공상정권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인민에게 주입하도록 하는 한편, 사회 각 부문에 걸쳐 강력한 통제정책과 권위주의적 지배체제를 강화하도록 했다.
이 와중에서 이들 국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교회는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 됐다. 각 나라마다 탄압의 강도는 각각 상당한 차이를 보였는데, 전 국민의 90%가 가톨릭신자이며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 토대가 굳건했던 폴란드와는 달리 이들 3국은 큰 탄압을 받았다. 그중 탄압의 강도가 가장 컸던 체코의 경우 1949년 10월 제정된 종교법에 따라 교회의 활동이 전반적으로 정부의 종무부의 통제를 받았고 교회는 사유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건물, 기타의 재산을 소유할 수 없게 되였으며 성직자에게 정부가 봉급을 지급하는 대신 모든 성직자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1950~53년 교황에의 충성을 철회치 않고 공상주의에 굴복치 않은 모든 주교들을 체포했으며 특히 1950년 4월에는 군대와 경찰이 모든 수도원과 수녀원을 침입하여 전체 1만 2천여명의 수도자들 중 8천여명을 투옥하는 등 혹심한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체코정부는 교회를 체제 내에 종속시키기 위해 전직신부이며 보건장관인 요셉 플로야르로 하여금 중공의 애국교회와 유사한 단체인「가톨릭성직자 평화운동(MHKD)」을 발족시켰다.
엄청난 박해
체코에서의 탄압양상보다는 덜했으나 유고와 헝가리에서의 종교탄압 역시 가혹하게 진행됐다. 1949년 소비에트체제의 정권이 들어서기 전인 1946년부터 이미 반 가톨릭캠페인이 시작된 헝가리에서는 1948년 가톨릭 자선단체인 까리따스회가 해산되고, 모든 가톨릭학교, 대학, 사회기관들이 탄압을 받았으며 교회와 주교들을 분열시키려는 공작을 행하는 한편, 1949년에는 Mi-ndszenty 추기경을 체포, 종신징역형을 선고하고 1950년에는 최소한 30여명의 신부와 수도자가 암살, 투옥, 국외추방 되였으며 약4천명의 성직, 수도자가 감옥 또는 강제수용소수용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러한 탄압저치이후 헝가리정권은 국가가 구성해낸 소위「진보적 가톨릭」교회와 소수의 신부들로 구성된「가톨릭액션」 단체를 후원했다.
한편 유고교회 경우도 1945년 티토의 주도아래 사회주의정권 수립 후 비슷한 탄압의 과정을 거치게 됐다. 1945년부터 1950년에 걸쳐 전체 22개 교구 중 3부분의 2에 이르는 교구의 주교자리가 공석이 되였으며, 3백48명의 신부가 살해당하고 2백여명의 성직자가 투옥됐다. 뿐만 아니라 12개의 신학교가 폐쇄되는 한편, 가톨릭계 신문 및 3백여개의 소도원도 몰수되고 수도자 역시 추방 되어 강제노역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처럼 동구권 3국교회는 공산정권이 수립될 무렵인1945년이래 20여년 가까운 기간 동안 숱한 탄압을 받아왔지만, 비슷한 시기에 똑같이 소련에 의한 공산 괴뢰정권이 들어섰던 폴란드의 경우, 정부에 약간의 양보를 하는 대신 정부로부터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아 이후 폴란드 자유화운동의 구심점이 됐던 것과는 커다란 대조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정부의 탄압에 대해 의연한 투쟁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일방적인 탄압에 속수무책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폴란드교회가 전 국민의 90%에 달하는 신자를 가진 엄청난 교세를 가진 반면, 이들 3국은 30~70%에 이르는, 상대적으로 약한 교세를 가졌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탄압에 전면적으로 맞서지 못한 것도 이유의 하나이며 특히 체코의 경우에는 전 국민의 보호자로서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던 폴란드교회와는 달리 근세이후 국민의 불신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 가장 큰 약점이 되였으며 이로 인해 교회탄압 당시 전 국민적인 반대운동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실제로 체코의 경우 1918년 체코지역과 슬로바키아지역의 통합으로 최초의 민족국가 수립당시, 외국세력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임장을 같이하여 반민족주의 세력이 가담했고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특권적인위치를 지키기에 힘쓸 뿐 교회의 체질개선 노력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신자들이 가톨릭교회를 떠나 독립교회인「체코 슬로박」교회로 떠났고 개신교측으로 개종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헝가리교회의 경우, 18세기 이래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정치적 생존뿐 아니라 종교적인 생존을 위해서 함께 싸워왔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무력을 앞세운 스탈린의 팽창주의 앞에 나름의 저항과 교회보존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 탄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또 유고의 경우는 종교구성에서 그리스 정교가 압도적인 교세인데다(가톨릭은 약 30%) 제1차 대전 후 통일당시의 그리스 정교와의 해묵은 갈등으로 말미암아 공산정권의 탄압의 압력을 효율적으로 헤쳐나 갈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교회가 이러한 탄압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은 소련의 사주아래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정권의 종교말살정책에 대한 자구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공산정권의 수립과정에서 대대적인 탄압의 대상이 됐던, 이들 3국의 가톨릭교회는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회복의 계기를 잡게 됐다.
사회주의 체제의 완성을 위해 동구권의 경제구조를 블록화하면서 기존 사업체를 국유화하고 중공업 우선정책인 인원동원정책을 실시하고, 전체주의적인 일당지배체제를 굳혀나가던 공산정권에 대해 인민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개인의 창의를 인정치 않고 명령위주의 전제적 경제운영으로 인한 경제성장의 둔화 등 경제적 곤경에 직면하게 되자 동구권 각국에 개혁의 몸부림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1948년에 소련의 블록화에 맞서 유고의 티토는「사회주의로의 독자노선」을 천명하고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으며 1953년 팽창주의의 대명사였던 스탈린의 사망으로 이완된 국제 분위기를 틈타, 지식인 테크노크라트를 중심으로 한 반소봉기가 1956년 헝가리와 1968년 체코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민중봉기는 즉각 소련의 무력개입으로 좌절됐지만 민중들 사이에는 정치적 자유의 확대와 경제적 평등을 위한 의식에 눈떠가기 시작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후 소련군의 침공이 끝난 후, 소련은 각국 국민의 불만을 희석시키기 위해 약간의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다. 가톨릭교회의 경우도 이전의 직접적 탄압에서 벗어나 약간의 선교상의 자유를 얻게 됐다.
체코의 경우 1969년 교회와 정부간의 관계가 호전되어 정부는 교회의 실체를 인체제의 실재성을 인정하여 상호 타협적 태도를 취하기로 묵계가 되었으며, 유고의 경우도 1966년 6월의 협정으로 정부는 교회에 대한 교황의 정신적 지배권을 인정했고 바티칸과의 관계를 인정했다. 헝가리에서는 1966년 6명의 주교가 교황에 의해 서임됐으며 1969년 이후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교구장의 임명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약간의 종교자유와 그간 단절돼온 바티칸과의 교류를 허용하는 정책을 동구의 공산정권들이 실시하고는 있으나 그 허용의 폭은 여전히 협소하여 노골적인 종교탄압은 피면하면서도 종교를 서서히 말살하기 위한 치밀한 공작을 펼치고 있다.
체코의 경우 1968년에서 78년 동안, 종교를 사적ㆍ생활에만 국한시키며 성직자들의 종교교육금지, 어용종교단체인 성직자평화운동의 재건, 대중매체에 의한 종교의 비판과 모략, 비밀경찰의 신학교 사찰 등의 통제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또 신부의 숫자를 의도적으로 제한, 새로 서품되는 신부의수는 사망신부의 1/5선으로만 규제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은밀하고 조직적인 탄압을 공산정권이 멈추지 않고 있는 한편, 교회도 약간의 종교자유를 잃지 않기 위하여 지나친 타협의 자세를 보여 오고 있기 때문에 체코, 헝가리, 유고 등 공산국가에서 종교자유의 확대는 지금까지로서는 반드시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실정이다.
정권에 복종한 성직자를 제외한 노동현장으로 추방된 성직ㆍ수도자들은 평신도로 신분이 격하된 이후에도 꿋꿋한 자세로 신앙생활 영위하는 등 저항의 모습을 보여 국민의 신뢰를 상당부분 회복했던 체코 교회는「프라하의 봄」이후 다시 타협으로 돌아섰다.
일례로 1977년 2백 41명의 정치적 자유를 주장한「77헌장」이 발표된 후 서명자들이 체포, 투옥 당했을 때도 교회가 침묵을 지켜 탄압기에 쌓아 올렸던 교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경우조차 있었다.
소련의 불간섭
그러나 동구교회의 완전한 선교자유의 획득은 아직까지 분명한 상황은 아니고 많은 난관이 따르고 있지만 최근 들어 소련을 위시하여 동구권 전반에 개방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고 정치적 자유로 확대되는 상황에 접어들고 있어 교회의 발전에도 희망을 걸게 하기도 한다. 특히 지난 3월 18일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유고방문 기간 중 발표한 이른바 「신베오그라드선언」은 이러한 종교해방의 분위기를 촉진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소련이 동구에 더 이상의 군사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며, 동구각국의 독자적인 노선채택을 인정한 이번 선언은 동구각국에 새로운 개혁의 전기로 작용할 것이며, 지금까지 부가 되여 왔던 교회에 대한 각종의 탄압도 상당부분 완화될 전망이다.
실제로 체코에서는 토마세크추기경의 주도로 새로운 교회설립인정, 사제임명의 자유, 당국이 몰수한 교회건물의 반환 무신론비판의 자유 인정, 교회언론의 자유 등 과거의 탄압시기에 상상도 하지 못할 종교자유청원운동이 펼쳐져 이미 35면 만에 처음으로 수도회설립의 인정 등의 전향적인 조치를 취한바 있고, 지난 3월 15일에는 민주화와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30년 만에 최대 규모로 일어났다고 외신은 전하기도 했다. 유고의 경우는 최근 가라반달에서 성모의 발현으로 많은 신자들의 순례에 식어가던 신자들의 신앙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 역사적 전통으로 봐서, 그리고 교세로 보아 공산권에서의 교회복음화의 시금석이 될 이들 동구국가의 복음화에는 소련이 과연 얼마만큼의 독자노선을 허용할 것인가 독자노선을 허용할 것인가 그리고 동구권 교회와 신자들이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리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인가 하는 변수다 놓여있지만, 멀고 험난한 가운데서도 이들 국가에는 점차 종교의 봄이 다가올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인 것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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