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항공의 시끄러운 프로펠라 여객기로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 꽁무니에서 번쩍번쩍하는 붉은 등과, 더욱 거센 소리를 내는 엔진의 소음으로 정신이 멍했으나 대지에 쌓인 흰 눈과 하늘위에 떠오른 반달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일찍 나온 반달 곁에 큰 별 하나가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
고운 피부에 앳된 얼굴을 한 어린 병정들이 애써 위엄을 보이며 군데군데 지키고 있었고 출입국관리소에서는 여권의 사진과 본인의 얼굴을 다섯 번 정도씩 대조하였으나 모두들 그런 일은 당여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고 서있었다.
소련과 중공의 공항에 관해서 짐 조사가 엄격하다든지 가지고 있던 돈을 압수당하기도 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메주고리에」를 떠날 때 거기 남은 순례객들에게 반지묵주와「메주고리에」평화의 여오아메달이 무사히 통과되도록 기도를 부탁하고 각기 수십개씩 가지고 왔는데 덕분에 우리 짐은 가는 곳마다 손끝하나 닿지 않고 통과되었다. 13개국 중 대만공항에서 트렁크하나를 형식적으로 보았고 차라리 한국공항에서 입고 있는 코트에 세금을 내든지 6개월 내에 출국했다 다시 오라고 하였다.
유고슬라비아로 떠날 때 다시 바꿀 수 없던 미화수백불상당의 돈은 소련에서도 유고슬라비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환전을 해주지 않았다.
러시아 정교의 사원과 고적이 눈에 많이 띄기 때문에 언뜻 느껴지는 인상은 십자가만 덩그렇게 내세워 지은 한국의 신흥교회건물보다 더 풍부한 종교적 운치를 모스크바는 가지고 있었다. 시가지는 삼분의 일이 숲인데 그들은「나무가도시의 페(肺)」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전에 많은 신경을 쓴다고 한다.
이렇게 도시의 숲에도 신경을 쓰는 그들이 하느님께 다시 마음을 돌릴 때 그 힘이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1981년10월 어떤 신부님 요청으로 마리아가「메주고리에」의 성모님께 몇 가지 질문을 했을 때 소련이 가장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국가로 될 것임을 예언하셨다고 한다. 또한 폴란드에도 큰 알력과 충돌이 있겠지만 결국엔 정의가 승리한다고 하셨다. 성모님의 간절한 요청으로 바치는 우리의 기도가 성부의 진노하심을 풀게 된다는 뜻이겠지만 그때가 오기까지엔 꼭 거치고 지나가야 할 사건 득이 있는가보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도 무턱대고 소련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지만「회개」가 의미하는 참 뜻이 하느님께로 전향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회개해야할 일이 있을 것이다. 자기에게 누가 회개하고 말하면 자존심 상할 사람도 소련은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는다.
나는 다른 곳에서는 소련남자들이 남성우위 의식에 꽉차있다든지 호텔종업원조차 손님의 질문에 명령조로 대답한다거나 남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일은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 같다고 말했지만 여기서는 감히 원수 사랑의 차원을 말하고 싶다.
공산주의가 들어가서 소련이 독재국가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가돌릭 교회 보다 세칭 더 전제성을 띤 동방교회는 공산주의사상이 도입되기 전에 이미 소련화하여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민주화사상이라든가 개인의 권리인정에 기초가 된 종교개혁, 르네상스, 또한 중산 계급을 부각시킨 서구의 산업혁명도 소련은 경험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12ㆍ13세기에 걸쳐 2세기반 동안 몽고군의 점령으로 무자비한 횡포에 시달렸으므로 그들은 독재적인 방법 외에 대접받았던 적이 없고, 또 피터대제가 서방과 무엇을 좀 해 볼려고 했으나 효과도 못보고 볼세비키 혁명이 1917년에 일어나서 그대로 공산화 되어 버렸다. 이렇게 슬라브의 전통은 인권사상의 발전이나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져본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에게 당했고 1차 2차의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국민이 쓰러졌다. 독일군이 점령했을 때 불과 한 도시에서 만 백만명이 죽었다. 후르시초프의 사위가 소련기관지「이즈베스치어」신문의 대표일 때 미국을 방문하여 당시 대통령이던 케네디를 만나서『우리는 2세기반 동안 잠잤기 때문에 미국보다 뒤떨어졌지만 잠자던 나라로서는 빨리 따라왔다. 만약 지금 소련의 위치가 서구에 있고 서구가 소련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서구라파 전통을 이은 미국은 소련보다 떨어졌을 것이니 미국이 오히려 소련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 케네디는 이 말의 뜻을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시내에서는 종교벽화나 십자가가 그대로 보존된 건물들을 보았고 동방교회 사제는 갈색수단을 입었는데 모양은 가톨릭사제의 것과 같았다. 목에는 커다란 은색 십자고상을 매었으며 예배는 오후에 매일 있고 주로 할머니들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날씨도 추웠지만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라 일단 호텔로 와서 쉬다가 다시 나갔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신년이브의 크레믈린 붉은 광장은 대낮보다 밝았고 청소년들이 떼를 지어 나와서 강강수월래와 꼭 같은 형태로 노래를 부르며 빙빙 돌았으며 샴페인과 불꽃놀이가 차가운 하늘을 어지럽게 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메주고리에」서 가져온 평화의 성모매달에 크레믈린궁전의 벽속에 안전하게 넣었다. 광장과 궁전은 너무나 완벽하게 지어져 약간의 시간은 걸렸지만 총을 멘 군인이 떠드는 아이들 쪽으로 갔을 때 일을 이루었다. 홍콩에 와서 친구에게 말하니 너무 위험한 일을 했다고 화를 내었지만 몇 억의 돈을 준데도 다시 하기는 어렵다. 소련여성위원회의 최고 간부들을 만나서 평화를 이야기 했다거나 굴이나 일용품을 사려고 눈 속에 일렬로 기다리는 시민의 표정보다는 나도 모르게 광선이 들어가서 카메라필름이 못쓰게 되어 얻은 교훈을 나누려한다. 현상을 한 후 기가 막혀 앉아있는데 소련에는 다시 가서 사진 찍어오면 되지만 만약 통회안하고 지내다가 그냥 잊어버린 대죄를 죽어서 알게 되거나 순간적으로 들어온 세속의 광선이 온 일생을 헛되게 만들 수도 있으리라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