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이 깊은 주름 하나하나마다 고난의 역사, 역경의 과거가 담겨있는 듯 했다. 「니하오마」「세세」그 이상도 그이하도 별도의 언어가 필요없는 소박한 만남이었다. 로사리오기도를 바치다 우리 일행을 맞은「김가항(金家巷)성당」의 중국 신자들은「니하오마」를 연발하며 잡은 손을 놓으려 하지않았다.
「상해」에서 35km 떨어진 김가항성당과 우리의 만남은 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150여년 전 우리의 첫번째 사제 성 김대건 ·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로 탄생한 곳이 바로 김가항성당이기 때문이었다.
『김부제는 약력 6월에(1845년) 현석문 등과 함께 상해 근처 김가항에 도척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8월 17일 페례올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됨으로써 한국의 첫 사제가 되었다』한국 순교자 103위전「믿음의 증거자들」이 기록하고 있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획기적 사건이 분명했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로 서품된 김가항성당은 상해와 더불어 김 신부의 피와땀이 그 어느 곳보다 짙게 서려있는 장소라 할수있다.
김씨성을 가진이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김가항은 현재 50여호채 못되는 가옥들이 모여있는 전형적인 중국의 시골풍경을 하고 있었다.
마을 중간쯤에 자리한 김가항성당 규모는 60~70평정도. 현재의 성당은 김 신부 서품당시로부터 세번째가 되는 성당이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가 대면한 김가항성당은 김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았던 그 성당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문화혁명 당시 종교에 가해진 무자비한 탄압에 비추어 본다면 시골 작은 마을의 성당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는 무리가 아닐수 없었다.
상해 서산성당에서 김가항성당에 도착한 것은 오후3시40분. 마침 성당에서는 20여명의 신자들이 로사리오기도를 마치고 있었고 대부분은 노인들이었다. 어김없이「조화」로 장식된 제대중앙에 모셔진 루르드성모상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제대를 정면으로하고 좌ㆍ우에 예수성심상, 성모성심상 액자가 걸려있는 것은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거의 대부분의 성당(공소를 포함) 제대 위에서 보아왔던 똑같은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슬리퍼를 신은 채 부채를 든 신자들은 소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매일 그 시간에 함께 모여 묵주의 기도를 바친다는 그들과 비록 말은 통하지 않는 만남이었지만 신자라는 공통분모 하나만으로도 따뜻함과 정겨움이 배어나오기에 충분한 듯 했다.
김가항성당 주변은 제법 넓었다. 성당을 중심으로 서있는 여러 채의 건물들은 비록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 옛날 김가항성당의 위용과 규모를 짐작케 해주었다. 성당 정면의 건물은 소규모 공구들을 만드는 작은 공장인 듯했고 대부분의 건물들은 농기구등을 제작하는 공장같았다.
안내자는 현재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주변 건물들은 본래 성당부지였으며 현재 관할 교구인 상해교구는 그 부지를 교회에 돌려달라는 교설을 벌이고있고 전망은 매우 밝은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앞서 만났던 상해의 김노현 주교는 공소로 전락해있는 김가항성당을 성당으로 환원시키고 아울러 새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포부를 우리에게 들려준바 있었다. 김 주교는 새 성전을 지은 후 그곳에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건립하자며 김대건 신부의 동상건립을 서두르는 우리 순례단의 조급한 제의를 탄력성있게 받아주었다. 현재의 성당으로는 동상을 세우기에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 동상건립의 시기를 늦추는 이유였다.
1845년 8월 17일 김기항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신부는 그로부터 열흘 뒤「횡당」(橫塘)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다. 1845년 8월 27일의 일이었다.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옛 모습 그대로라는 횡당성당앞에서 설레는 가습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당시 횡당성당은 신학교 부속성당이었다는 김가항성당에서 버스로 약4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150여년전 조선의 첫번째 사제가 감격의 첫 미사를 봉헌했다는 바로 그 현장에서 우리는 감의 기도를 모아 바쳤다.
횡당성당의 제대 정면에는「성모영보」그림액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검은 휘장들로 장식된 횡당성당 내부의 독특한 분위기는 장례예절을 상설로 거행하는 성당이라는 설명에서 이해가 되었다. 횡당성당 옆에 납골당을 건립 중이라고 안내원이 귀띔을 해주었다.
김가항성당, 그리고 횡당. 조선 천주교외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역사의 현장에서 당시 조선으로의 귀국을 위해 흘렸던 김대건 신부의 땀과 피의 발자취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5살의 어린나이로 최양업ㆍ최방제와 함께 유학길에 올랐던 소년 김대건이 마카오에서의 수학을 일부 마치고 조선으로의 입국을 거듭 시도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를 비롯, 모방 샤스땅 신부가 순교한 사건과 맞물려있다고 할 수 있다.
1839년부터 41년까지 이어진 기해대박해로 조선천주교회는 거의 초토화되었고 또다시 성직자 영입이 불가피했던 시기였다. 당시 신학생의 신분으로 귀국을 시도하던 김대건은 조선천주교회의 밀사 김프란치스꼬를 만나 자신의 아버지를 포함, 조선교회의 기둥들을 거의 휩쓸어간 기해대 백해의 실상을 전해 듣게된다.
김대건이 마카오를 떠난 것은 1842년 2월이었다. 아직 공부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지만 김대건은 프랑스군함 에리곤호 세실제독의 요청에 따라 통역관으로 선발되었고 그를 추천, 동행한 것은 매스트르 신부였다. 바로 그해 12월 국경지대「변문」에서 김대건은 김프란치스꼬를 만났던 것.
상해 북경 두만강 의주 변문봉천 훈춘 경원으로 이어지는 귀국로 개척은 쉽지가 않았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귀국로를 찾던 김대건은 결국 장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돌아와 남은 신학과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1844년 12월 김대건은 최양업과 더불어 페레올 주교 주례로 부제품을 받는다. 장춘에서 1시간30분 정도가 걸리는「소팔가자성당」은 1985년에 새로 지은 성당답게 산뜻한 모습이었다.
작은집 8채가 살기시작해서 붙여졌다는 특이한 이름의 소팔가자는 김대건이 부제품을 받기까지 남은 공부를 마친 장소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있어 순례자들을 들뜨게했다.
김대건 신부가 생활하고 공부한 장소가 그대로 남아있다는 고(故) 오기선 신부의 확고한 주장을 토대로 우리의 탐색은 시작됐다. 한달 전 주임으로 부임했다는 중국인 여(呂) 신부는 8순의 고령. 여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흔적을 찾으려는 우리의 치열한 노력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소팔가자성당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는 듯 했다.
1시간이 넘는 대화와 현장조사 끝에 우리가 얻은 결론은 성당 왼편쪽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바로 그 장소」일 것이라는 일방적인 진단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증언자를 찾는다면, 또 자료를 구할수만 있다면 소팔가자에서의 김대건의 흔적은 어쩌면 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우리는 버리지 않았다.
1845년, 다시 귀국길을 모색하던 김부제는 상해 오송구를 거쳐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 마침내 성공을 하게된다. 그해 1월 15일 김대건, 부제는 서울땅을 밟은 것이다
3개월에 걸친 국내체류기간 중 김부제는 신학생을 뽑아 교육하고 조선지도를 작성하는 한편 순교자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온갖 정열을 쏟았다. 4월 30일 김부제는 제물포를 떠나 다시 상해로 향했다. 조선교구 제3대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입국을 도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역곡절 끝에 상해로 돌아간 김부제는 드디어 사제서품을 받는다. 45년 8월 17일 김가항성당 서품식은 한국교회사에 뚜렷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이 땅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지 꼭 66년만에 우리의 목자가 처음으로 탄생한 대사건이었다.
그해 10월 황산포를 통해 페레올 주교 다불뤼 신부와 함께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활동은 눈부셨다. 조선교회의 재건을 위해 뛰었던 김대건 신부, 수선탁덕 김 신부는 그러나 선교사를 맞기위해 해로를 물색하던 중 관헌에게 체포되고 만다. 1846년 6월 5일 연평도근처 순위도가 바로 그 장소가 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1846년 9월 5일「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이 붙은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한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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