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과연 바른 배려를 가지고 서로의 다른 점들을 덮어주고 공통의 동기에서 함께 일할수가 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본보기로서 종교와 인종과 민족에 구애됨이 없이 진정한 협력을 하게 된다면 이로 인하여 다른 국제적인 노력들도 촉진될 수가 있을 것이고 좀 더 실효를 거둘 수가 있을 것이며, 또한 우리들이 다른 더욱 깊은 헌신활동에 나아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호소가 받아들여진다면, 그래서 그대로 행동에 옮겨진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기아를 퇴치하겠다는 야망도 결코 반드시 그리 머나먼 꿈일 것만도 없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불의와 증오와 폭력으로 차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이르는 도처에서 우리는 주교 시노드가 묘사한바『자유를 질식시켜 인류의 대부분으로 하여금 보다 의롭고 우애스런 세계를 건설, 향유하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지배와 압제와 포학의 조직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희망과 기쁨을 주는 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체성사입니다.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상징인 성체성사입니다. 이 대회의 과업은 그러한 사랑에 참여하여 그것을 실질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일입니다. 어떤 행동이 없이, 내가 제안한 바와 같은 그런 어떤 행동이 없이 우리의 성체대회가 세계에 내놓을 무슨 참된 메시지가 있겠습니까? 즉, 현대인이 귀를 기울이고 믿어줄 메시지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증거가 없이 우리는 무슨 증언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대회의 주최국이며 독립 2백주년 기념제를 거행하고 있는 큰 나라는 어떻습니까. 이 나라는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주도적인 지위를 세계에 내어줄 용기와 결의와 아량이 있는 것입니까? 한때는 아메리카의 세 나라가 바다 건너 다른 나라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때가 있었습니다.『나에게 달라. 너희의 지친 자들을, 너희의 가난한 자들을/자유로이 숨쉬기를 동경하는 너희의 오합지중을/비천한 자들이 너희의 풍요한 해안을 키질하노니/이들을 나에게 보내라/집 없는 자들을 폭풍에 밀려난 자들을 /내가 황금 문 앞에 등불을 들고 있노라』고.
오늘날 세계의 지친자들이나 간난한 자들이나 집 없는 자들이나 굶주린 자들은 자유의 여신상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권리가, 즉 자유와 정의와 먹을 것에 의 권리가 필요하며 또 그런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나라와 다른 부강한 나라들이 의롭고 관대한 국제정책에 의하여 밝은 양식으로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필요하며 또 그런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편에서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해서 우리는 주춤하여 물러설 것입니까! 이런 희생이야말로 바로 단식이 의미하는 그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 자신이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셨다-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누어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이사58, 6~7)
이것이 오늘의 세계에 있어서 성체성사의 완전한 거행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노력들을 축복하시고 이들을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여러 배로 늘어나게 하시어 세계의 굶주리는 이들에게 대처하시게 되는 것은, 오로지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적으나마 가진 것들을-몇 개의 빵과 생선을-내어줄 때라는 것을 잊지맙시다. 하느님께서 한 과부를 구해주신 것은, 오직 그 과부가 가진 양식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고난 뒤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1열왕17, 15~16참조). 게다가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는 전혀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람이고 다른 하느님을 섬기는 사라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엠마우스로 가는 길의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고 발견한 것도 다름 아니라 한 낯선 사람과 자기들의 빵을 나누어먹을 때였습니다(루까24, 30~31참조).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