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
10월 29일 일요일
비록 짧았지만 싱가포르에서의 기항은 멋졌다.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였다. 경리부에 무세 신부의 편지 1통과 대구의 보고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1일 토요일
그저께 저녁의 폭풍우와 추위 때문에 오늘 정오에 다시 출발해서 타이완해협을 지나 이틀 동안의 힘든 항해 후에 상하이에 도착했다.
12월 16일 화요일
9일에 일본을 떠나 어제 저녁 서울로 돌아왔다. 뮈텔 주교 사우어 주교 모리스 주교와 나는 앞으로 있을지 모를 공의회를 위해 모든 것을 규정했다. 그리고 뮈텔 주교와 백동의 중학교에 우리 소신학생을 보내기위한 협약을 했다.
12월 23일 화요일
파리에서 영세했고 내가 부산의 회장으로 임명한 방바오로씨가 이곳에서 이틀을 보낸 후 오늘 부산으로 떠났는데, 그는 여기서 좋은 인상을 남겼다.
■1931년
1월 8일 목요일
대구의 도지사가 죠프르 원수의 사망에 조의를 표하러왔다. 지독한 날씨는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그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도지사는 적절한 도로를 내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이것은 그의 선임자들이 1920년과 1924년에 한 약속들을 다시 한 것이다.
2월 13일 금요일
부활절에 출발하는 새 선교사가 우리에게 파견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바이욘느교구의 파이에(Paillet′方若鐘) 신부이다.
3월 2일 화요일
나는「선교사잡지」에 1백주년(조선교구 설정 1백주년을 말한다)에 관한 꽤 긴 논설을 보냈다. 오늘 마산포의 휴양소(선교사들의 집)를 위한 계약서에 서명했다.
3월 27일 금요일
우리는 공의회 프로그램을 마무리 지었다. 5명의 교구장들과 서울의 보좌주교로 구성된 회의의 사실상 의장은 대구교장인 나였는데, 뮈텔 주교는 나에게 그의 권한을 위임했다.
4월 29일 수요일
일본 천왕의 생일인 일본 국경일. 지사의 초대를 받고 나는 날씨가 나빠 외출이 불가능한 경우가 아니고는 수락한다고 대답했다. 비가 일요일 저녁부터 내리고 있어서 아무도 가지 않았다.
5월 7일 목요일
밤에 무세신부에게 도착한 전보에 의하면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모든 신부들이 나의 아버지를 위해 미사를 드렸다. 하느님의 뜻대로 되기를!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지만 슬퍼하지는 않았다.
5월10일 일요일
주교미사 후에 김스레파노(金洋洪) 신부가 서원을 했다. 그는 오늘부터 장차 방인교구가 될 수련기인 전라도의 두신부들과 앓고 있는 나주의 朴在秀 신부를 제외하고 감목대리구의 모든 신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주성당의 축성식을 가졌다.
7월 7일 화요일
「턴쥬교회보」가 조직이 강화되고, 나는 그것을 교구의 기관지로 인정했다.
8월 9일 일요일
회람 제76호에서 나는 공의회를 위한 기도문과 기도를 지시하고 마산포 휴양의집 개관과 입원의 조건을 알렸다. 8월 31일 월요일 2명의 청원자 수녀들의 착복식과 6명의 수련자들의 서원식이 7시에 시작되어 8시 40분에 끝났다.
9월 8일 화요일
성모회를 위한 미사가 동굴에서 있었다. 영성체는 2백 5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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