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성체와 교회의해」정묘(丁卯)년 새해새아침이 밝았다. 어둠을 가르고 솟아오른 새날의 햇살은 이땅 곳곳을 새로운 생명력으로 넘치게 할만큼 풍요의 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기심과 불신, 교만과 람욕으로 상처난 마음을 깨끗이 불사르고 무릎꿇어 맞이 해야할 이 아침, 그 길을 앞서가는 한 신앙인이있다.
가난하지만 결코 부끄러워 하지않고, 이 세상에 속해있으되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굳센 믿음을 가졌으되 결코 자랑하지않는 사람. 질그릇처럼 투박하나 투명한 영혼이 숨쉬며 거듭되는 가난과 외로움속에서도 소중한 하루를 살아가는 김정득씨(52ㆍ안나ㆍ여주본당)의 삶은 새해를 맞는 우리 모두 옷깃을 여미게한다.
경기도와 충정북도 경계에 위치한 여주땅.이곳에서 장호원으로 20㎞떨어진 지점에 덕진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김정득씨는 아들여섯, 딸 하나, 칠남매의 홀어미로 살고있다.
지아비는 5년전 오랜 병고끝에 세상을 떠났고, 조그마한 단칸방에서 오직7남매를 위해 살아온 김정득씨는 평범한 어머니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새벽4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단잠을 자고있을 시간이지만 김정득씨는 언제나 이때쯤 눈을 뜬다. 주의기도와 성모송을 마친후 집안일을 시작, 새벽다섯시에 보통 가정주부들이 여덟ㆍ아홉시경에야 끝낼 모든 일들을 끝낸다.
단잠에 곯아 떨어져있는 막내 중기의 이부자리를 다시한번 다독여주고 나면 이웃집 닭들이 간간히 홰를 치게 된다.
아직은 그리 춥지 않은 금년 겨울이지만 아침기온은 옷매무새를 다시 여미도록 한다.
그리고 간단한 복장에 큰 양동이 서너개를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선다.그러면 막내를 제외하고는 자식들 모두가 어머니를 배웅한다.
오늘은 집에서 20리나 떨어진 양평시장으로 향한다.
매일 이곳저곳 새로 서는 5일장을 찾아 그는 발길을 옮겨야 한다.
안가본 시장이 없을 정도로 많은 시장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그러나 결코 외로움은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주머니속에 소중히 간직된 묵주가 그의 넉넉한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가 혹은 시장에서 마음이 흔들릴때면 묵주기도로 하느님에게 청원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항상 따뜻히 응답해주십니다』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때는 버스를 이용했지만 이제는 자주자주 걷기도 한다.
김씨가 버스를 자주 타지않는것은 통학생들에게 짐이 되기싫고 공연스레 운전기사의 눈치를 받기가 싫기 때문이다.
탈곡하고 난 볏단뭉치가 가지런히 쌓여있는 논길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어느사이 동녘하늘에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동네 마을에 흰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머리에 인 양동이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무겁게 느껴지는 김씨는 불현듯 5년전 세상을 떠난 남편과의 단란했던 추억들을 떠올린다.
꿈같던 신혼시절 그리고 네째 복회까지 낳고 가난하지만 그런대로 행복했던 시절, 그리고 17년동안 간경화증으로 고생했던 남편, 그 남편에게 약한번 제대로 담여줄 수 없었던 아픈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다.
남편이 병들어 눕게되면서 떠맡겨진 가장역할, 그리고 7남매의 어머니 역할이 처음에는 못내 무겁기만 했는데 22년이 지난 오늘 자식들 모두가 아무탈없이 자라는 것을 볼때면 무어라 하느님께 감사의 말을 해야할지를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시장이 눈앞에 보인다.
항상 찾아가는 도매상주인은 외상거래이지만 김씨를 언제나 따뜻하게 맞아준다.
땅콩ㆍ밤ㆍ소금ㆍ호도ㆍ무우 등등을 차려놓고 장사를 시작하는 김씨의 모습은 3시간 남짓을 걸어온 사람같지않게 피곤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시골의 순박함이 아직도 그래도 숨쉬고있는 5일장안에서의 장사는 경험해보지않은 사람은 그 독특한 맛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무우 몇개를 팔아야 십원정도가 남는 장사이지만 김씨는 누가 하나를 더달라고하면 주지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성미이다.
가끔씩 틈나는대로 성가를 부르기도하고 두손모아 기도를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하는 것은 기도문을 통채로 외워 반복하는것이다.
그러다보니 배운 것은 적지만「가난한이는 복되다」는 성경말씀과 「자기가 노력한 댓가는 정당하게 받아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김씨는 시장내에서 자리다툼과 암투가 생길때마다 적절하게 대처해 나가곤한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나면 저녁에는 몸과 마음이 함께 피로하지만 정당하게 그리고 온힘을 다해 벌은적은 액수의 현금이 그녀에게는 더 없이 소중하기만하다.
집에갈 준비를 하던 김씨는 옆집 생선가게에 들렀다.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세째 창기가 오늘 내려온다는 편지가 왔기에 동태라도 몇마리 사가지고 갈 참이다.
집에 몰아 오면서 김씨는 아직 자식들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또 다시 이사를 해야된다는 것 때문에 잠시 근심에 쌓인다. 벌써 몇번째인가. 교육비와 생활비에 급급하다보니 제대로 발붙이고 살 집이 여태껏 없었던것이다.
무허가 토담집을 지어살다 이사를 한 것이 몇년째인가. 그러나 김씨는 어디를 가던지 7남매가 살 곳이야 없겠느냐는 강한 마음으로 근심을 떨쳐버리고 자식들과 함께 할 저녁식사 생각에 벌써 마음이 따듯해진다. 오랫만에 온가족이 모이는 저녁식탁이 아닌가.
식사를 마친 김씨가족들은 웃음꽃을 피운다. 세째의 공부이야기는 식구들에게 더없는 희망을 던져준다.
잠자리에 들기전 식구들 모두가 둥그렇게 모여앉아 저녁기도를 바친다.
『주 하느님, 오늘 우리식구들이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은총내려주시어 감사합니다. 내일도 우리모 두가 하느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가지 않는 삶을 지낼 수 있도록 특별히 도와주소서…』
단칸방의 좁은 방이지만 김씨는 오늘따라 방이 넓게만 보인다. 가난하지만 가난을 탓하지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김씨와 그의 가족들은 평범한 한 신앙인이지만, 김씨의 삶은 진정 가난하게 사는 것이 어떤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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