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제5회에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종교정책과 종교의 박해과정 및 가톨릭교회의 현황을 소개한다. 소련은 전통적으로 러시아정교회국가였으며 정권과 종교와의 갈등문제는 대부분 정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는 주변적으로 다루어졌다. 결론을 먼저 밝히면 정교회와 가톨릭교회 등 제종교는 오랜 박해에도 불구, 그런데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신앙의 불가사의한 신비성을 엿볼 수 있으며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신앙의 속성을 일면 이해,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공산화 된지 70년이 넘은 소련에서도 동구와 마찬가지로 종교는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공산정권은 종교를「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고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 지난 70년간 줄기차게 박해해왔으나 민족종교인 러시아정교를 비롯 가톨릭ㆍ개신교ㆍ이슬람교 등 연방 내 제종교를 완전히 말살시키지 못했다.
혹독한 박해로 말미암아 이들 종교들은 성직자와 신자 및 교회당등 대부분의 것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세게 버티어 왔으며, 최근 들어서는 정부의 대외개방정책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17년 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전국민의 90%이상이 독실한 러시아정교회 신자였으며, 정교회는 러시아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한편 가톨릭교회는 7개교구에 6백만명 가량의 신자를 포용하고 있었고 개신교는 2백만 정도의 신자를 갖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혁명으로 인해 종교의 모든 것이 뿌리 채 흔들렸던 것이다.
절망의 소련교회
혁명을 성공시킨 소비에트정권은 러시아정교회를 위시한 제종교가 자본가 및 지주계급 등 반 혁명계급을 옹호, 그들의 혁명운동을 방해한다고 보고 박해의 칼날을 시퍼렇게 갈고 있었다. 교회 역시 극도의 무신론이며 교회에 갖은 적대행위를 일삼는 혁명정권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미 칼자루를 쥔 레닌은 교회와의 투쟁에 있어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대중을 상대로 종교를 비판공격 하는 강연회를 곳곳에서 개최, 1차적으로 교회와 인민을 유리시키는 이른바「고립전법」을 구사하는 한편, 혁명이듬해인 1918년 포고문을 발표하고 교회를 국가와 학교로부터 각각 분리시키는 등 교회의 영향력을 서서히 감소시키는「고사작전」을 병행시켜 나갔다.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은 국민대다수가 정교회신자여서 이들의 반발을 우려한 대문이며 또한 교회와 처음부터 전면전을 벌일만한 역량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실제로 혁명당시 공산당원수는 5만여명에 불고하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정교회신자는 1억)
물론 노골적으로 반혁명운동을 한 성직자는 처음부터 투옥, 살해됐고 교회와 수도회건물이 더러 파괴 약탈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교회와 달리 교세가 약한 가톨릭교회는 혁명초기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고 몇 년 되지도 않아서 적어도 외형상의 교회는 러시아영역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참상을 겪어야 했다. 신학교가 폐쇄됐고, 성직자는 대부분 체포되거나 망명해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모히레프」라는 대교구의 경우 1917년 4백 70명의 신부와 3백 31개의 본당이 있었으나 1932년에는 오로지 16명의 신부와 30개의 본당만이 남을 정도였다.「쉬토뮈르」교구도 2백명의 신부 가운데 불과 6명만이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정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를 잠시 유보한 정권은 공산주의체제가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려가자 이내 본성을 드러냈다.
1925년「전투적 무신론동맹」이라는 반종교 활동 전위대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연맹은 모든 공장, 관청 및 학교에 무신론자 세포조직을 형성,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무신론으로 가득 차게 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을 감시 고발하며, 반종교 간행물과 영화를 상영했다.
특히 이 연맹은 1933년 「반종교 5개년 계획」이라는 것을 꾸미고 모든 성당의 폐쇄, 가정과 직장에서의 신자일소, 장여성직자 체포 주장 등을 목표로 종교말살을 위해 혈안이 돼 설쳤다.
또 이를 위해 이 연맹은 기상천외의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무신(無神)강조주간의 달」을 제정하는가 하면 무신론 성서발간대회를 개최하고 높은 상금을 걸고 무신론성가(聖歌)현상공모도 실시했다. 반종교 박물관도 여러 곳에 개관했다. 모스크바의 전 수녀원이었던 중앙 반종교 박물관에는 수녀들의 음란 방탕한 생활을 담은 그림 등을 전시,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도록 했다.
혁명전 러시아에는 70개교구에 5만 4천 1백 74개의 교회와 1천 25개의 수도원 및 1백 30명의 주교, 5만 9백 60명의 신부, 9만 4천 6백 29명의 수도자와 1억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1923년까지 28명의 주교와 1천 2백명의 신부와 수십만명의 신자가 반혁명의 죄로 처형됐다. 1936년까지 성직자의 80%이상인 4만 2천여명의 신부들이 사형, 투옥, 시베리아 유형 등을 통해 제거됐다. 또 성당 등 거의 모든 종교 시설들은 파괴되거나 박물관, 극장, 창고 등으로 변형돼 소련정교회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가톨릭교회는 더 심했다. 前백러시아대학교수인 예수회 Gㆍ슈바이겔 신부에 의하면 1938년경 러시아에 가톨릭신자는 불과 50만명 가량 남아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모스크바」「레닌그라드」등지에 겨우 5개의 본당이 문을 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교회도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소련판 까다꼼바
비록 총만 들지 않았을 뿐 교회는 치명타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와 용감히 맞서 싸웠다. 투옥된 신부들은 수용소 내에서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했으며 노동자신분으로 전락한 신부들도 몰래 전교활동을 펴 하나 둘씩 신자들을 포섭했다. 일부 성직자와 신자들은 지하교회(까따꼼바)로 들어가 교회와 신앙을 보존했다. 신자들은 겉으로는 종교를 버린양 행동 했으나 비밀리에 가정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일부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스타르죠이」(Starzoi)라는 비밀 순례단을 조직하고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각 지방을 다니며 전도했다.
그토록 끈질기게 박해해오던 당국도 1930년대 말에 이르자 마침내 전의(戰意)를 일부 상실하기 시작했다.
반종교 5개년 계획에 의하면 10월 혁명 20주년이 되는 1937년까지 국민들의 마음에서 신을 제거토록 되어있었으나 실상은 그렇게 되지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와 신부 등「가시적(可視的)인」 교회제도는 그들의 뜻대로 거의 소멸됐으나 국민들의 정신 속에는 여전히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1938년 마침내 그 악명높던「전투적 무신론연맹」은 회원수가 5백만에서 2백만명 수준으로 줄어들더니 몇 년 뒤인 1941년에는 아예 해체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소련에게 2천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손실을 안겨주었으나 교회에는 종교자유를 위한 서광으로 비쳐졌다.
나찌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나라를 지켜야만했다. 이 과정에서 정권은 교회에 다소숨통을 트여주는 대신 대독전쟁의 협조를 요구했다.
1942년 5월 2일 총무교행정담당자「쎄르기우스」가 모스크바관구 대주교로 공식인정 받았으며 유명한「트리니티」수도원의 성 미카엘성당이 새로 봉헌됐다. 국가는 저렴한 가격으로 교회건축용 건자재를 교회에 제공하고 압수한 교회건물들을 되돌려주기 시작했다.
교회도 이에 보답, 3억루불을 모금하여 소련육군에 편입된「디미트리 돈스코이」기갑사단을 무장시키는 것을 비롯, 전선으로 나가는 병사들에게『하느님의가호가 있기를』하고 빌어 마지않았다.
전쟁으로부터의 고통은 소련 사람들로 하여 종교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출전중의 병사들 절반가량이 정교회 신자라는 사실이 비공식적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또 전쟁 중 교회와 신자들의 협조를 얻기 위한 교육지책으로 내놓은 종교자유에 관한 정부와 교회간의 협정은 전쟁 중 대체로 잘 지켜졌으며 전후에도 그런대로 유지됐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전후 소련에는 2만여개의 교회가 단장을 새로이 하고 2만 5천여명의 신부들이 다소 제한적이나마 활동을 재개했다. 1946년 99개소의 수도원이 문을 열었고 교회는 성직자 양성 권한을 정부로부터 받아 모스크바신학교가 제 기능을 발휘했으며 레닌그라드에도 정규신학대학이 설립됐다.
가톨릭교회의 비극
한편 소련은 전쟁말기「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등 발틱 3국과「동폴란드」「베싸라비아」등 새로운 영토를 병합함으로써 약 8백만에 달하는 가톨릭신자를 통치하게 됐다.
이들 가톨릭교회 역시 정교회가 당해왔던 수난의 전철을 밟지 않으면 안되었다. 리투아니아 가톨릭교회는 합병 전 3명의 대주교가 7명의 주교아래 8백개 본당과 1천 6백여명의 신부 및 전인구의 70%가량인 2백 50여만의 신자가 있었다.
소련은 민족주의의 탄압과 맥을 같이해 강한 민족성을 띤 이 나라 가톨릭교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로마와의 정교조약을 폐지하고 교황대사를 추방했으며 신학교를 폐쇄했다.
1936년 말 3백 50명의 신부가 제거됐고, 1949년까지 60만에 이르는 가톨릭신자를 소련 내 여러 지방과 국외로 추방했으며, 1950년에는 또다시 60여명의 성직자를 간첩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1954년까지는 5백여개의 성당이 폐쇄, 6백여개만 남았다. 신부도 절반가량인 7백 40여명만 활동하고 있었다.
1964년 발간된 미국의 한 조사통계에 의하면 1917년부터 1959년까지 소련에서 55명의 주교, 1만 2천 8백명의 수도ㆍ성직자 및 2백 50만명의 천주교신자가 살해됐으며, 1백 99명의 주교와 3만 2천명의 신부 및 1천만명의 가톨릭신자가 투옥되거나 국외로 추방됐다고 한다.
한편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으나 현재 소련에는 2백 50만명의 리투아니아신자를 비롯, 대략 5백만명정도의 가톨릭신자와 1천여명의 신부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87년판 미국가톨릭연감에 의하면 리투아니아에는 현재 6개의 교구와 5명의 주교, 6백31개의 본당, 7백명의 신부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체제內 순종
정교회의 협조로 독일과의 전쟁을 힘겹게 이긴 스탈린정권은 전후 많은 국민들이 교회를 다시 찾아가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이후 스탈린을 계승한 후르시초프는 또 다시 종교박해의 고삐를 당겼다. 1961년 연방공학국 신형법은 종교 활동을 엄하게 제한했으며 조금이라도 법에 저촉되면 가차 없이 투옥시키고 교회를 폐쇄했다.
브레즈네프시대에 들어와서는 재 박해의 추세가 다소 완화, 기본적으로 정권과 교회와의 타협이 이루어져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교회가 사회주의 체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대외평화선전의 일익을 담당하는 반면, 정권역시 개인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의 활동을 직접, 노골적 간섭은 되도록 피하고 있다.
그러나 이타협도 어디까지나 소비에트 권력주도형 타협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가톨릭의 「바티칸」과 비교되는 정교회의 성무원(聖務院)은 종교소비에트의 통제아래 있다. 상임위원의 임명과 배치가 소비에트권력층의 수중에 있으며, 토의안건조차 총주교와 위원들은 지도부와 미리 상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체제 내 「길들여진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종교회의 현황은 소련종교문제평의회의 공식보고에 의하면 1975년 현재 7천 1백 62곳의 교회와 5천 9백 94명의 신부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서방측의 전문가들은 이 가운데 4천 5백 군데의 교회가 문을 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4~5천만명의 정교회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중앙아시아 쪽에는 1천 6백만명 가량의 이슬람교 신자가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오늘날 소련사람들은 유아세례를 받게 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으며 많은 가정에서 성화를 걸어놓고 있다. 젊은이와 지식인들은 성서를 갖고 싶어 하고 교회를 기웃거린다.
이 같은 종교에의 복귀현상은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자체모순으로 포화함에 따라 목표가 희미해졌으며 또한 전통적, 민족적, 개인적 및 종교적 가치등 가치관이 다양화된데 크게 연유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 도시화와 집단화가 급격히 이루어짐으로써 발생한 인간소외현상을 타개하는 한 방법으로 신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제일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개방화로 달음질치는 소련사회자체의 변화와 이에 따른 종교자유의 허용추세이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이후 개방화정책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소련공산주의자들은 결코 종교를 이기지 못했다. 교회역시사회주의체제를 극복치 못했다. 아니 오히려 교회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존재라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 이런 해석이 전제될 때 공산주의 치하에서도「건재」하는 교회의 존재양식을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도 가능하리라 짐작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