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텔 주교와 고종 임금과의 긴밀한 관계는 1895년 알현이 있은 후에도 지속되었다. 1903년은 고종이 즉위한지 40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교황 레오 13세는 고종에게 친서를 보내고 그것을 뮈텔 주교로 하여금 고종에게 전하게 했다. 그러나 고종의 즉위 40주년 경축식은 여러번 연기되었고, 그러는 동안 교황도 서거하게 되니 뮈텔주교는 교황의 친서를 주한 프랑스공사로 하여금 외부(外部)에 전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1904년이 되면서 일제는 2월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5월에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에 조약을 강요했다.
이에 신성균(申成均)과 심선택(沈選澤)은 상해(上海)로 망명한 파블로프 주한러시아 공사에게 서한을 보내 러시아의 보호를 얻어 일본세력을 물리칠 계획을 세우고 뮈텔 주교의 지원을 요청했다. 뮈텔주교는 지원을 약속하는 동시에 그들을 추천하는 서한을 고종에게 보냈다.
이에 앞서 뮈텔 주교는 7월 21일 또다시 고종을 알현하게 되었다. 이번 알현도 교황의 친서를 전달한다는 명분아래 고종이 자청한 것이었다. 그때는 알현도 정지된 상태였음으로 허락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신(申)과 심(沈)의 노력으로 성사될 수 있었고 또 대궐에서는 교황친서전달이라는 명분 때문에 가마까지 보내 주교를 호송하게 했다.
알현은 저녁 7시경에 시작되어 반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뮈텔주교는 교의친서를 제출하고, 지난번 교황의 친서를 전달하지 못한 경위를 설명 했다. 임금은 교황과 로마 등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나서 주교에게 일본과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교는 일본은 몇 주간 들렸을 뿐이고 중국에는 3년간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북경에도 있었느냐고 묻자 주교는
『아닙니다.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만주에만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교님은 이번 전쟁에서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아시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의 원언을 여구하기 전에는 판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어 뮈텔 주교는 이 어려운 시기에 황제와 함께 염려를 같이하고 있으며 또한 신자들과 같이 매일 하느님께 황제와 나라를 지켜주도록 기도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황제는 손을 내밀어 감사의 뜻을 표명했고 이로써 알현은 끝냈다.
1905년 11월 결국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에는 이또(伊藤博文)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함에 따라 영국 공사를 위시하여 각국공사들이 모두 철수했다. 이에 고종은 비운의 앞날이 임박했음을 예감했던지 그해 6월 11일 아주 중요한 문서들을 철궤에 넣은 후 그것을 그의 생질 조남승(趙南升)을 시켜 뮈텔주교에게 보내 보관하게 했다. 그리고는 1907년 7월 20일 결국 고종은 폐위당하고 말았다. 경운궁(慶運宮)에 은거하는 동안 고종은 뮈텔 주교가 유럽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그의 생질을 주교에게 보내『나를 대하듯 생질을 대해주면 고맙겠다』는 간절한 문안편지를 보냈다.
1910년 4월 27일 돌연 부통감이란 사람이 뮈텔주교를 찾아와 철제의 보관여부를 물었다. 보관하고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주교에게 협박조로 정치적사건에 연루될지도 모를 그런 중요한 문서를 맡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교는 『나는 그런 내용은 모른다. 황제의 부탁이기 때문에 맡았을 뿐이다. 주인이 아니고는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틀 후 이번에는 프랑스 영사관에서 와서 그 철궤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5월 6일 이번에는 조남승이 일본경찰 여러 면과 함께 와서 철궤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래서 뮈텔주교는 내용을 확인하고 영수증을 받은 후 철궤를 조에게 넘겨주었고 이렇게 유명한 철궤사건은 끝났다.
철궤 안에 들었던 중요한 문서들이란 무엇이었을까? 뮈텔 주교는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학문과 영문으로 된 여권 같은 서류들이라는 말을 했다. 또 부통감은 그것이 정치적사건에 연루될 수 있는 문서들이라는 말을 했다. 이런 말들로 미루어 철궤에 들었던 문서가 외국과의 조약문서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고종은 뮈텔 주교를 아버지처럼 신뢰했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뮈텔 주교도 그러한 신뢰를 조금도 저버리고 하지 않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뮈텔 주교는 즉시 문상을 갔다.
대한문 앞에서 저지를 당하자 그는 천주교 대표로서, 무엇보다도 고인과의 친밀했던 관계를 내세워 입궐을 요구했고 이리하여 그는 대한문을 지나 빈소까지 가서 방명록에 서명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날 뮈텔 주교는 만세 시위가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경찰의 저지를 무릅쓰고 장례식장까지 들어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는 장례행렬이 종현(명동)성당 부근을 지날 때 조종을 울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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