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본당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가을에 예산본당으로 갔다. 예산은 합덕본당에서 갈라져나간 본당이었는데 읍이라 그런지 교우가 퍽 적었다. 주임신부님이 계셨고 유치원에는 교사들도 별도로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어려운 일 없이 지냈다. 따로 독립을 해서 막 성당을 지으려고 하던 때라 주임신부님과 함께 밥만 먹고 나면 마땅한 자리를 보러 산으로 들판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큰일이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이정도이고 달리 예산본당에 대해 특별한 추억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예산에 이어 다음 발령지는 중림동본당이었다. 내가 용산신학교에 오기위해 많은 도움을 받았던 여신자가 중림동교우였던 만큼 아주 역사가 깊고 또 개인적으로도 관계가 있던 중림동본당인지라 많은 기대감이 있었다. 중림동본당시절을 떠올리면「가명학교」를 빼뜨릴 수 없다.
중림동본당이 1895년 설립해 운영해오던 보통학교였는데 나는 약1년간 그 학교의 교감직을 맡았었다. 교사들이 모자랐기 때문에 나도「수신과」를 맡아 4ㆍ5ㆍ6학년을 가르치는 교사노릇을 했다. 중림동에서 있었던 1년간은 가명학교와 주일학교에 심혈을 쏟으며 청소년들과 많은 접촉을 가졌다.
아쉬운 중림동을 뒤로하고 1929년 내 고향이 있는 호아해도 해주본당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인 만큼 일견 마음이 푸근한 면도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해주지방에서 유력한 집안이었던 두 교우 집안의 불화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31년까지 2년간 사목을 하면서전임 서기창신부가 시작했던 성당 신축공사를 완료하는 등 나름대로 산적해있는 문제들을 풀어가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었다.
해주본당에 이어 발령받은 곳은 옛날부터 유배지로 유명했던「곡산」본당이었다. 다산선생이 유배를 살기도 했던 곡산은 유배지라는 말에 어울리게 토질이 척박(瘠薄) 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31년~41년까지 내생애에 가장 왕성한 시절10년을 보낸 풍요로운「사목지」였다.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나에게 맡겨진 과제는 초대 박정렬 신부가 장림리 일대의 과수원을 매입해 성전을 짓는 등 어렵게 뿌려놓은 신앙의 씨앗위에 하나하나 토대를 쌓아가는 일이었다. 곡산은 병인박해 때 서흥에 살던 교우 고첨지부부가 잡혀와 순교를 당하는 등 신앙의 역사가 깊은 곳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가톨릭이 전교를 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신교 예배당은 몇 십 년 전부터 들어와 이미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처음에 가자마자 과수원의 사과나무가지를 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전임신부가 1천 5백여평에 달하는 과수원을 매입해 사과나무를 1백주나 심어 놓았었는데 그만 병을 얻는 바람에 제대로 가꾸지 못해 사과나무는 한마디로 기가 막힌 꼴이었다. 사방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일단 가위를 가지고 나가 사과나무가지를 치고 과수원모양을 다듬기 시작했다.
평생 그런 일을 배워본 적도 해본일오 없기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그럴듯하게 잘라 나갔다. 한번 과수원 일을 시작하면서 한번에 어른지게에 잔가지가 몇 짐이 나올 만큼 열심히 일을 했다.
곡산 읍에는 우리본당이 경영하던 과수원이 유일한과수원이었기 때문에 이런 나의행동은 자연히 주민들의 눈길을 모았던 것 같다.
얼마 후에는 마을에 『천주교신부가 새로 왔는데 나무를 그렇게 열심히 자른다. 그쪽 방면으로 아주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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