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서울로 올라온 문선명은 5월 1일「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라는 명칭으로 교단을 창립하였다. 통일교의 공식적인 출발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통일교가 기성교회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창립직후에 발생한 세칭「연대사건」과「이대사건」부터였다. 연대사건은 당시 연세대학교 교수였던 박상래 교수와 수명의 학생들이 통일교에 입교한 사건을 말하며, 이대사건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였던 양윤명 교수를 비롯한 여러 명의 교수와 학생들이 통일교로 개종한 사건을 말한다. 개신교대학인 두 대학으로서는 이 사건을 묵과할 수 없어 진상조사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 진상조사가 사건을 보다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있던 김영운 교수에게 진상을 조사토록 하였는데, 진상조사차 통일교를 찾아간 김 교수마저도 통일교로 개종하였던 것이다. 당시 김 교수가 통일교의 교리에 매혹 당하게 되었던 것은 그녀가 이미 신비주의인 스웨덴 브르그의 영계설(靈界說)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이에 놀란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1955년 김 교수를 비롯한 다섯명의 교수를 파면하였으며, 12명의 학생들을 제적처분 하였다. 또한 연세대학교에서는 박 교수를 파면하고 두 명의 학생을 제적처분 하였다.
이 사건이 종결된 직후, 통일교에서는 문선명 교주가 구속되는 사건을 겪게 되었다. 즉, 1955년 7월 4일 문 교주가 4명의 제자들과 함께 병역법위반과 징발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이 당시 몇몇 일간지에 보도되었던 통일교에 관한 혼음보도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통일교에서「7ㆍ4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문 주교가 3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무죄 석방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사건을 치른 이후, 통일교는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57년에는 전국 1백 16개 지방도시에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며, 1958년에는 일본으로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1959년에는 미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특히 일본과 미국으로의 선교사 파견은 통일교가 이 두 국가에서 수많은 활동을 전개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한편 문선명은 1965년 1월부터 10개월간에 걸쳐 세계40개국을 순방하는 세계 순방을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통일교의 세계선교 활동은 급속도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문선명은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현재까지 주로 미국에서 선교활동을 지휘하고 있다.
격화됨에 따라 통일교에 관한 논란과 물의는 수없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각국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교회들은 통일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닌 이단종파 내지는 경제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사이비 종교라고 규정하면서 신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 시작하였으며, 세계 각국에서는 통일교가 청소년들의 가출을 교사함으로써 가정파괴를 조장시킨다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통일교에 대한 비난과 탄압은 통일교의 활동이 활발한 미국에서 보다 많이 일어나고 있다. 문선명은 1973년「워터게이트사건」으로 궁지에 빠진「닉슨」대통령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는 한편 1974년에는 백악관 앞에서 72시간동안 닉슨지지데모와 금식기도를 하였으며, 1976년에는 뉴욕의「양키스타디움」에서 미국건국 2백주년 기념집회를 가졌고, 또한 1978년에는「코리아게이트사건」또는「문게이트 사건」으로 불리 우는 사건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통일교가 미국의 국회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고 하여 미국의 정치계와 언론계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건을 말한다. 그 후에도 문선명에 관한 논란과 비난은 계속되었는데, 1981년에는 뉴욕검찰청으로 부터 탈세혐의로 기소당하여 18개월간의 징역형과 2만 5천 달러의 벌금형을 받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1984년 7월 20일부터 13개월 동안 코네티커트주 댄버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통일교가 이와 같은 비난과 수난을 받게 된 것은 통일교의 활동이 정치적 경제적 성격을 다분히 띠우고 있고 선교방법 또한 다분히 도전적이라는 점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또한 거기에는 유색인종인 한국인이 미국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대한 미국인들의 자존심 손상의식과 인종적 우월의식(ethnocentrism)도 크게 재임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문선명은 가끔 일반인들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계획들을 발표함으로써 세인들을 놀라게 한다. 예를 들면 그는 일본ㆍ한국ㆍ중국ㆍ남아시아ㆍ중동ㆍ동구ㆍ유럽ㆍ소련을 연결하는 「희망의 국제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며, 80년대 초에는 1988년에 세계 공산주의의 중심지인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신앙집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세계의 오대양을 인류의 빈곤퇴치를 위한 양어장으로 만들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통일교의 활동이 정치ㆍ경제ㆍ언론ㆍ교육ㆍ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있고 그 규모 또한 세계적인 것은 그의 이러한 의지와 열의, 그리고 도덕적인 성격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문선명은 1960년 4월 11일 현재의 부인인 한학자(韓鶴子)와 결혼하였다.
당시, 문선명은 41세였으며, 한학자는 18세였다. 통일교에서는 이들이 결혼한 4월 11일을「부모님 성혼식」이라는 축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이탈자들에 의하면 이 결혼식을 계기로 통일교에서는 신약시대가 끝이 나고 성약시대(成約時代) 즉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이들 부부에게서는 13명의 자녀가 출생하였는데, 1960년 이전에 문선명에게서 출생된 자녀까지 포함하면, 문 교주의 자녀는 16명에 이른다. 이들 중 2명은 사망하였다. 통일교에서는 문 교주의 자녀들 생일을 모두「○○님 탄신일」로 기념하는 축일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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