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지내고 있던 어느 날 곡산읍의 유지 5명이 나를 마나러 성당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곡산읍에 유치원이 하나도 없으니 유치원을 만들어달라고 제안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유지들의 뜻은 충분히 이해가 갔으나 당시 본당의 경제사정이 너무 빈약한지라 나는 『돈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한 유지의 부인이 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보모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며 마치 애원하듯이 유치원설립을 간청했다. 결국 간청에 못 이겨 본당에서 유치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본당 전체의 일인 만큼 공소에 통지서를 보내 모든 공소회장을 소집했다.
회장들이 모이는 날이 됐는데 갑자기 곡산읍의 유지로 동아일보 지국장을 맡아보고 있던 교구 청년회장이 나에게 찾아왔다. 회장들이 모여 있는 방에 「고등계 형사」가 따라왔다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회의를 시작해야 하는데도 그 형사가 나가지 않아서 다른 공소회장들도 그 자리에 들어가기를 꺼린다는 사연이었다. 당시는 일제시대라 일경의 횡포가 무척 심했던 만큼 고등계형사라고 하면 모두가 이맛살을 찌푸릴 정도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린이 유치원을 짓겠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고등계 형사가 따라와서 방해를 하고 있는 꼴을 보니 분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냉큼 달려가 그 형사가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나 이런식의 경찰은 참을 수 없다. 서장에게 가서 할 말 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옆에서는 청년회장이 『이 신부님은 서울 중림동에도 계셨고 황해도에서도 훌륭한 일을 많이 하신 어른인데 당신 때문에 무척노기가 나셨다』고 덩달아 큰소리로 떠들면서 내가 마치 대단한 인사(?)나 되는 것처럼 거들었다. 대충 분위기를 본 형사는 자기가 불리하다고 판단을 내렸는지 내 앞에서 그냥 잘못했다며 싹싹 빌었다. 나는 형사에게 『우리 천주교는 비분결사(悲憤決死)단체가 아니며 공개적으로 모든 일을 하고 사람들을 양심적으로 지도한다고 설명하고는 『모든 사람이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인데 무엇하러 쫓아와서 불편을 주느냐』고 호통쳤다.
이렇게 형사가 쫓겨나가자 곡산읍 사람들은 내게 「호랑이 신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 형사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읍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곡산에서 사목활동을 했던 10년 동안 그 형사도 그대로 곡산에 있었다. 첫 사건에서나 한데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그 후로는 이형사와 큰 다툼은 없었지만 천주교에 대한 일제의 감시만은 끊이지 않았다.
고등계형사를 내쫓고 공소회장들과 회의를 계속했다. 회장들은 모두 원사를 하나 짓도록 힘쓰자고 결의하고는 그 자리에서 「5백원」을 신립했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1원, 한말은 50전이었는데 5백원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염두도 못 낼 거액이었다. 회장들의 열의에 힘입어 성당 옆에 집을 하나짓고 유치원을 개교했다. 곡산읍 최초의 유치원이 문을 연 것이었다.
유치원과 과수원을 돌보면서 한편으로 전교에도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만 있었지 읍 전체를 통틀어 대인교우가 10명에 불과해 전교를 하고 싶어도 인력이 없었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교분야가 그 지방 유지이자 열심한 개신교 신자였던 영감님 큰아들의 장례를 계기로 술술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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