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의 침학(侵虐)행위는 1895년이 되면서 더욱 심해지고 더욱 빈번해졌다. 사건은 정월초하루부터 일어났는데, 그것은 단순한 애들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물포(오늘의 인천)성당 마당에서 연을 날리며 놀고 있던 한국인 소년들에게 지나가던 일본청년 4명이 연을 빼앗으려고 시비를 걸다가 싸움이 벌어졌다. 말리러 나왔던 복사도 게다짝으로 얻어맞았다. 마라발(Maraval) 본당신부도 달려 나왔다. 일본순사가 와서 한국소년을 때렸다. 말리는 신부를 15명가량의 일본인들이 몰려와서 주먹으로 치고 수염을 뽑고 발로 걷어찼다.
순사는 바라만 보고 있었다. 또 순사 두 명이 왔다. 일본순사는 그 소년을 끌고 가려 했다. 신부는 일본 영사관까지 같이 가자고 했으나 일본순사는 그대로 가버렸다. 복사는 남아있는 군중을 내쫓으려했다. 그랬더니 3명의 일본인이 그를 돌과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그 바람에 신부 댁 유리창이 깨지고 신부도 돌에 맞을 뻔 했다.
수녀들은 신부가 살해되는 줄 알고 마당으로 뛰어나와 말렸다. 일본인들은 말리는 수녀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차고 달아났다.
마라발 신부는 곧 진상을 서울 주교관에 알리는 한편 제물포의 일본 영사관에 항의했다. 영사관에서는 사건의 진상조사와 범인의 처벌을 약속했다. 그러나 며칠 후 서울의 일본영사관에서는 가해자는 일본인이 아니라 시누라고 하며 적반하장 격으로 신부의 처벌을 요구해 왔다. 정말 그들은 너무나 뻔뻔스럽고 그지없이 파렴치했다. 그러나 힘 앞에서는 어찌 할리가 없었다.
그해 5월 비슷한 사건이 이번에는 종현성당과 수녀원 구내에서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매일같이 진고개 쪽 문을 통해 들어와서는 같은 행패를 부렸다. 한번은 일본청년 10여명이 진고개문으로 들어와 수녀원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가라고 했더니 수녀원과 마당에서 놀고 있는 고아들에게 돌을 던졌다. 또 한 번은 주교댁 마당까지 와서 주교관 안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나가라고 하니까 그들은 나가는 체 하면서 정원으로 내려가 희귀한 화초 등을 뽑아갖고 달아났다.
수녀원은 진고개 쪽으로 일본인들과 이웃해 있었기 때문에 경계선 문제로 그들로부터 불쾌한 일을 더 많이 당해야했다. 한 일본인은 수녀원 쪽 구멍을 이용해 자기 집의 더러운 하수를 그쪽으로 흐르게 했다. 또 한 일본인은 수녀원 경계선을 침범, 자기 소유지를 만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뮈텔 주교는 르페브르(Lefevre)프랑스 공사에게 서한을 보내고 이렇게 하소연했다. 우리는 서울ㆍ용산ㆍ제물포 등 일본인들과 이웃해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일본인들로부터 불쾌한일을 매일같이 당하고 있다. 그것을 일일이 다 적으려면 한이 없을 것이기에 최근 서울에서 겪은 몇 가지 사실만을 적는다하면서 위에적은 몇 가지 사건을 구체적인 예로 들었다. 그간 우리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일본당국의 보증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약속은 지금까지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뿐더러 날로 더 심해가고 있다. 정말 일본인은 참을 수 없는 이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공사의 중재를 요청하는 것이니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 과연 이번에도 일본측은 경비대장을 보내 사과를 했고 또 일본영사가 와서 진고개 현장까지 확인하고 갔다. 그러나 10일이 못되어 같은 장소에서 또 사건이 발생했다.
양로원을 위해 안성에서 쌀을 싣고 진고개 쪽 문으로 들어오던 마차가 통로가 너무 좁아서 이웃 일본인의 하수구를 건드렸다. 그러자 일본인은 마부를 때렸고 양로원의 말딩은 성당땅이라고 항의했다. 순식간에 1백여명의 일본인이 모여들어 말딩에서 중상을 입혔다. 교회측은 통로의 반을 뺏기고도 매까지 얻어맞은 셈이 되었다.
영사관에 항의했더니 일본영사가 와서 일본상인의 거짓 진술서를 근거로 도리어 일본인이 코를 얻어맞았다고 하며 일본인 의사의 진단서까지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밖에서는 일본인과 성당하인들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한 하인은 하도 화가 나서 일본인의 머리를 때렸다. 일본인측은 그것이 과잉방어였다고 하며 또 처벌을 요구했다. 뮈텔주교는 영사에게 말딩의 옷에 대한 손해배상과 진고개쪽의 자유로운 통행을 요구하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부득이 진고개쪽 통로를 폐쇄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진고개쪽 문은 교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통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침범을 막으려면 일시적으로라도 그것을 폐쇄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렇게 경계선 문제로 시작된 이른바「진고개사건」은 서울교구당국의 큰 두통거리의 하나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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