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1세기 말엽 교회의 상황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께 대한 반성을 자기 복음서 안에 반영시킨다. 교회는 영적이며 천상적 그리스도와 역사적이며 지상적 예수를 분리시키는 영지주의(靈知主義)가 현설(假現說)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영지주의적 이원론(二元論)은 하느님의 아들이 진정 역사 안에 들어오셨음을 수긍할 수 없었고 그 이단자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요한2, 22-24:4, 22이하). 이어 단을 거스려 요한은 예수의 생애가 그분의 신비 안에서 이해되지만 그 삶이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것임을 역설한다. 그의 관심사는 역사이면에 있는 심오한 것, 신비이지만 이 신비는 「살(肉)안에 있는」신비로서 역사와 긴밀히 결부된 것이다.
요한복음서는「말씀」과「아들」의 복음서라 불리 우며 예수가『그리스도, 하느님의 안들』(20, 31)이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쓰여 졌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서이다. 그 분 안에서 구약의 모든 약속이 실현되었고 그분에게서만 세상의 구원이 오는데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신 아들이기 때문이다. 빨레스띠나에서 사셨고 설교하신 나자렛 예수이며 교회 안에 살아계시는 신앙의 그리스도인이신 그분은 성사들을 통해 사람들을 계속 성화시키심을 강조하는 복음서이다. 「하느님의 나라」개념대신에 생명, 진리, 빛 따위의 희랍철학개념을 사용한다. 예수의 생애를 연대기에 따라 상세히 보도하지 않고 그「상징적 사건」들을 기술하려한다. 그리스도의 공생활과 관련된「표징」과 「행적」들을 모은 부분(1-12장), 수난과 부활과 연관된「수난」과「영광」에 관한 부분(13-21장)으로 엮어져있다.
하느님의 말씀
머리말(1, 1-18)은 초기공동체의 전례문에서 따온 것으로 공동체의 신앙을 증거 한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작가의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그분은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하느님 말씀이며 하느님의 영원한 세계에서 오셨다. 그분은 두 측면에서 신성을 지니신다. 말씀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1, 3). 아버지와 친국한 관계에 있는 말씀이시다. 또한 말씀은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시다. 창세기 1장의 말씀처럼 창조의 원리이시다:『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1, 3). 창조의 원리, 만물존속의 원리이시다. 말씀이 인성을 취하셨다:『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라는 표현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나타낸다. 강생은 인간성 및 사람들과의 관계 두 측면에서 고찰된다. 『살이 되다』(14절)는 인간조건의 나약성을 그대로 지닌 인간이 되었음을, 강생은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심으로써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모든 행적인 곧「살이 되신 말씀」의 행적이다. 그분은 우리 눈에 보여진 하느님의 영광,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하느님의 계시자이시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은총을 충만히 받았고 생명의 진리를 받았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아버지에게서 나왔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아들(17, 11)이시다. 「아들」칭호가 19번이나 나타나며(1, 34ㆍ49:3, 18:5, 25등)「외아들」칭호도 보인다. (1, 14ㆍ18:3, 16ㆍ18)우선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신 아들이다. 파견이란 예속, 순종의 뜻이 내포된 개념이다. 아들은 삶, 행적과 말에 있어서 전적으로 아버지께 의존해있다. 아버지를 위한 존재로서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전력투구한 공관복음서의 예수가 요한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사는 아들로 나타난다.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일하며(5, 43:10, 18ㆍ25)아버지에게서 심판의 권한(5, 23) 생명의 권한(5, 26)을 받았다. 아버지의뜻을 이행함을 양식으로 살은 아들은 온전히 아버지를 위해 일하신다(5, 30:6, 38). 예수는 하느님께 대한 예속, 전적신뢰, 순종 속에 살아가는 아들이시다. 그것은 그분이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인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의 전적예속은 아버지와 일치에서 나온 것이다. 원의, 행위, 기쁨, 사랑, 심지어 존재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 행위(5, 17:19, 26), 상호의존(17, 10)상호인식(15, 10), 상호내재(10, 38), 사랑(5, 20:15, 10), 그러나 상호구별이 없는 일치 즉 혼합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생명을 바친다(10, 18). 아버지는 아들보다 위대하다(14, 28).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증언해주시므로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신다(5, 36-40).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심오한 사랑의 부자관계가 있다. 아버지가 천지창조 이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심을 아들은 항상 인식하고 있는데(17, 24ㆍ26). 아들은 순종으로써 아버지의 사람에 보답하신다(14, 31:15, 10).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사랑을 보답하고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바치신다:『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가자』(14, 31). 아들의 파견과 죽음은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의 완전한 계시자이시다(14ㆍ7, 9:12, 45). 아버지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은 아버지의 볼 수 있는 모습이다(1, 18:14, 7). 아버지의 밝히 드러난 영광이다(1, 14:17장 참조). 아들이 아버지의 모습, 사랑,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는 길은 순종이다.
아들은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고 그분과의 유일무이한 관계를 드러내 보이신다. 공관복음서가「하느님나라」개념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듯이 요한복음서는「아들」호칭으로써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하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복음서는 아버지와 맺고 있는 아들의 독특한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아들의 온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들이신 예수의 온 생애는 그 사랑에 대한 그분의 자발적 보답 곧 순종으로 특징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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