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자면「별 성사」를 빼놓을 수 없다. 1년 중 봄가을로 공소신자들을 방문하는 것을 별 성사라고 불렀는데 한번 가면 밀린 성사 주랴 찰고 하랴 2~3일씩 머물기가 예사였다. 워낙 사제수가 적은데다 교우들은 산골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어서 별 성사를 줄때가 되면 신부들은 앉아서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얼마나 편한가.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신부들 중에는 공소까지 갔다가 미사만 봉헌하고는 부리나케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그럴 바에야 왜 공소까지 애써 찾아가는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지금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신부가 별 성사 주러가는 날은 공소에서 보면 하나의 큰 신앙행사였다.
성경이나 성물을 파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신부는 성물장사처럼 묵주나 책등이 가득들은 보따리도 꼭 가지고 가야만했다.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외국신부님들은 짐꾼과 함께 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나는 짐꾼이 없어 자전거를 주로 타고 다녔다. 교우들이 워낙 애가 타게 이날을 기다리기 때문에 비가 아무리 많이 쏟아져도 정해진 공소방문을 뒤로 물릴 수는 없었다. 커다란 보따리를 뒤에 동여매고 비를 주룩주룩 맞으면서 공소를 찾아다닐 때는 혼자생각해보아도「기가 막힌」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도 잠깐、신앙에 목말라 있는 교우들을 만나면 그런 생각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성무를 집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1939년 가을에 방문했던「다락괴」공소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억거리를 남겨주었다. 이웃 본당신부의 부탁으로 대신 공소예절을 봐주러 가는 길이었는데 공소에서 아무도 짐을 지러온 사람이 없어서 터덜터덜 혼자서 공소에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보니까 강당은 먼지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를 해놓았는데 신자들은 물론 공소회장도 보이지 않았고 온 동네는 시끌시끌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더니 경찰이 강당으로 올라와 두리번거리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 거동이 하도 이상해서 점심상을 가지고온 공소회장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날이 다름 아닌「청결검사 날」이라는 것이 아닌가? 청결검사라면 1년에 1~2번씩 주민들 동태를 조사할 목적으로「일본 놈」들이 정치적으로 마련한 행사인데 왜 그것을 하필이면 별 성사 날 한다는 것인가?
뭔가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 당장이라도 신계군 경찰서로 찾아가 따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다고 오후 3시 무렵에야 성무를 주기 시작했다. 저녁에「만과신공」까지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회장을 불러『왜 오늘 청결검사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회장의 대답은 더 기가 막혔다. 『오늘 청결검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에 이 신부님이 오셨을 때는 순경이 같이 먹고 자고하는 것은 물론、신부님이 떠나셔야 그 사람도 경찰서로 돌아갔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하도 놀라서『그러면 고해성사는 어떻게 주었느냐』고 물었다.
이장은 머뭇거리다가『그때에도 순경이 같이 앉아 있었다』고 대답했다. 신부는 뒤로 하더라도 오랜만에 마음 졸이며 고백성사를 보는 신자들은 그 악명 높은 일경이 떡하니 옆에 버티고 있으니 죄를 고백하고 싶어도 다시 그 죄가 목구멍 너머로 넘어갈 판이었을 것이다. 그말을 들으니 그건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내게 공소예절을 떠맡긴 것 같아 갑자기 이신부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곡산읍에서「호랑이 신부」라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감히 일경이 옆에 따라붙지는 못하고 청결검사란 명목으로 교우들의 모임을 방해하는 정도로 그쳤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위하면서 화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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