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교회의 사건만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까지도 무수하게 목격해온 종현성당(현 명동성당)의 역사는 한국 가톨릭에서 그곳에 대성당을 위시하여 주교관, 수녀원, 고아원, 인쇄소 등 필요한 시설을 갖추기 위해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던 해부터 광활한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지는 1887년 말에 이르러 2만평을 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간 30여회에 걸쳐 인접한 가옥과 전답을 계속 사들인 것이었다.
그런데 1887년 정리 작업이 시작되자 돌연 한성부에서 교회의 토지소유권을 억류하며 공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교회측의 정당하고도 강력한 항의에 못 이겨 소유권은 1889년 말에 반환되었다
종현성당 위치는 남쪽은 진고개(당시는 본정사정목(本町四丁目) 현재는 충무로4가)와, 북쪽은 메이지 거리(명치정(明治町) 현재의 명동)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문은 북쪽의 정문 외에 남족에도 진고개문 또는 이현문(泥峴門)으로 불리던 조그마한 후문이 있었다. 이문은 특히 성당의 건축공사를 위해 세워진 것으로써 수레가 지나갈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진고개가 일본인이 거주하는 거리가 되면서 일본인 또는 일본 군인들은 계속 진고개문을 통해 성당구내에 들어와서는 행패를 부림으로써 성당측은 수시로 괴롭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1895년에 이문을 통해 떼를 지어 침입한 일본청년들이 수녀원을 들여다보고 또 신부와 수녀를 구타한 사건과 수녀원과 인접한 일본인이 수녀원 땅을 침범한 사건을 보았다. 이것이 이른바 「진고개사건」으로 불리는 것이다.
「진고개 사건」은 크게 침입해서 행패를 부린 「침학」(侵虐)사건과 교회 땅을 조금씩 먹어 들어간 「잠식」(蠶食)사건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건은 계속 병행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교회측에서는 일본당국의 협조를 얻어 1895년 4월 20일 진고개문 앞에 「한인물입」(閑人勿入)이란 푯말을 세웠다. 그래도 폐단이 끊이지 않자 4월30일 부득이 그 문을 완전히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별 소용이 없었다.
1904년 5월 15일 그날은 성신강림대축일이었다. 서양사람들을 위한 9시반미사를 드리러갔던 뮈텔 주교는 50명가량의 일본 군인들이 성당 안에서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일본군당국에 항의했으나 1주일도 못되어 또 많은 군인들이 와서 주일미사를 방해했다.
2년 후인 5월에는 더 독성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9시 반 미사를 지내려던 뮈텔주교는 일본 군인들이 성당 안에서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것을 보았는데 개중에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군인까지 있었다. 주교는 그 군인한테 달려가 담배를 뺐고 나가라고 떠밀었다. 군인은 도리어 반항하며 주교를 주먹으로 때렸다.
진고개문은 두개의 돌계단과 소로(小路)로 진고개 거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소로라고는 하지만 사인교(四人轎)는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소로양편에 마쯔오(松尾)와 야마구찌(山口)란 두 일본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담을 싸면서 길쪽 땅을 먹어들어 감으로써 길이 좁아졌다. 뿐만 아니라 마쯔오는 성당에서 세운 담과 언덕 밑을 파고들어가며 자기 땅을 넓혔다. 이와 같은 소유지 침해에 대비하기위해 교회에서는 1898년 프랑스 철도기사 라페리에르(de Lapeyriere)로 하여금 경계선 일대를 측량케 했다.
1903년5월 프랑스영사 베르토(Berteau)가 일본영사 미마시(三增)와 부영사 데부찌(出淵)를 대동하고 현장을 확인하러왔다. 그들은 마쯔오 집 앞을 지나다가 마침 곡괭이로 성당언덕 밑을 파는 것을 목격했고 미마시 영사는 마지못해 그것을 중단시켰다.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마쯔오는 혼란한 시기를 이용하여 성당 땅을 침범, 거기에 집을 새로 지었다. 성당 문을 없애버리고 자기 집 문을 새로 냈다.
교회측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1906년에 가서야 알았다. 당시 교구당가인 비에모(Villemot) 신부는 이러한 사정을 경성 이사청(京城理事廳)에 알리는 동시에 마즈오로 하여금 그 의문을 철거하고 피괴 된 성당담장을 보수케하도록 요구했다. 미우다(三浦)이사는 현장을 와보고 법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며 그러나 소장은일어로 만들어야 하고 변호는 일본인에게 맡기라고 권했다. 그래서 교회측에서는 부득이 1906년 10월, 일본인 마쯔오를 상대로진고개 토지분쟁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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