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노력에 힘입어 내가 떠날 무렵인 41년경에는 부임당시 10명에 불과했던 신자수가 1백명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곡산의 후임지로 정해진 곳은 역시 같은 황해도의 신천본당. 때는 왜정말기라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전쟁이 터졌고 또 곧이어 동족의 비극인 6ㆍ25사변까지 일어난 신천본당시절은 내 90평생에 가장 극(劇)적인 기억을 남겨준 곳이다. 49년에는 반공삐라를 제작한 혐의로 신천읍 내무서에 끌려갔다가 화장실벽을 뚫고 도망치는「필사의 탈출」을 경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부임당시만 해도 나는 이런 일들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신천본당의 6대 신부로서 열심한 사목활동을 펼칠 결의만을 다지고 있었다. 신천은 병인방해가 일어나기 전인 1864년부터 베르뇌(張敬一) 주교가 방문해 공소가 열렸다는 유서 깊은 본당이었다. 그 지형적 위치도 매우 뛰어나 황해도의 중심에 자리한데다 북으로는 황해도의 명산인 구월산이 버티고 있었고 남으로는 천봉산이 솟아올라 해주를 지나 수양산까지 그 기세를 뻗치고 있었다. 천봉산 꼭대기에는 우국지사인 안중근 열사를 길러낸 유서 깊은 청계동공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신천은 이상스럽게도 옛날 박해 때 산골짜기로 피난을 간 교인들 때문에 천봉산과 구월산에는 일찍 공소가 들어서 있었지만 신천읍에는 황해도 읍소재지 본당으로는 가장 늦은 1930년에야 본당이 생겼다.
부임해보니 전임 박원영 신부는 3대 임충 신부가 새 성당을 지으려고 구입해놓은 부자 집을 개조해 성당으로 꾸며놓았고 그 옆에는 본당에서 운영하는「미화(微花)유치원」이 건축 중에 있었다. 미화유치원은 신천읍 최초의 벽돌 건물로 크기는 80평 정도였고 성당으로 사용되는 옛날 기와집은 높이가 9자나 되는 큰집이었다.
한데 전임신부는 유치원 지붕은 종이로 이어놓고 벽돌 공사만 크게 시작해 온채 당진으로 가버려 부임하자마자 유치원부터 손을 보아야할 형편이었다. 부임하던 첫해 여름 내내 이 유치원공사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이 지냈다. 종이지붕을 치우고 슬레이트를 올리느라 멀리 서울에서 슬레이트를 주문해와 최신식 벽돌건물을 완성시켰다.
신천으로 부임하고 1주일 후에 곡산본당의 한교우로부터 이상한(?)내용이 적힌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는 본당을 옮길 때마다 따라 다니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 편지는『구 신부님이 말수도 적고 행동이 정중한「양반신부」라는 내용으로 신분증이 갈 테니 안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곡산에서 나를 호랑이신부라고 사방에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던 고등계형사가 직접 여론조사를 해서 양반신부라는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보냈다는 것이었다. 호랑이신부가 졸지에 양반신부로 바뀌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양반신부라는 신분증 덕택인지 미화유치원을 짓는 것을 비롯해 부임 첫해는 특별한 어려움이 없이 사목에 힘 쓸 수 있었다. 황해도는 그때까지 준교구였기 때문에 장래 교구가 될 때를 대비해서 5천여평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특별히 신천군 면장을 관리인으로 삼고 관청서식에 다라 장부정리를 잘해서「똑똑하고 세밀하게 문서정리를 잘하고 신부」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움도 얼마가지 못했고 왜 정말기가 한발 짝씩 다가옴에 따라 교회에 대한 일제의 간섭도 점차 그 정도가 심해졌다. 청년신자들은 큰 첨례 때만 되면 성극을 하겠다고 꽤나 떠들썩하게 굴었는데 그때마다 연극대본을 경찰서에 가져가서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주임신부인 나로서는 그것도 큰 고충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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