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탄압은 계속 그 도를 높여가 성당을 포함, 모든 교회당내의「종」까지 군납물자로 내놓으라고 위협해왔다. 1942년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 노기남 주교가 성성식(成聖式)을 가진지 얼마 안 있어「총독부」는 노 주교에게『일제히 성당의 종을 바치라』는 공문을 보냈다. 노 주교는 절대로 종을 바칠 수 없다는 결의를 표했고 나는 그 결의가 담긴 정식 공문을 43년4월에 받았다.
나는 교회법을 조목조목 들어 종을 내어줄 수 없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 그 공문을 보면서(불가부) 이 공문 때문에 종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즉시 판단을 내렸다. 「일본 놈」들이 이런 식의 정면도전을 결코 인정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신천본당에 있던 종은 일명「소화 데레사 종」으로 불리던 아름다운 종이었다. 종구(鐘口)가 1m나 되고 높이는 1m 30cm정도인데 종표면에는 소화 데레사의 초상이 새겨져있어 신자들모두가 애지중지하던 터였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종을 바치지 않을까하고 혼자서 궁리를 시작했다. 당시는 일본 고등계형사의 눈길이 워낙 매서웠기 때문에「종을 숨기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 혼자 하기로 마음먹었다. 부활주일까지 종을 치고는 일꾼들에게 종을 종각에서 내려 광문 앞까지만 가져다 놓으라고 부탁했다. 되도록이면 사람의 발길이 뜸한 때를 골라 어느 비오는 날 공사를 시작했다. 허리를 쭉 펼 수 없을 정도로 나즈막한 그 광에서 갱이와 삽을 이용해 흙을 파내기 몇 일. 한 달을 꼬박 고생한끝에야 종을 집어넣고 감쪽같이 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남과 이북이 제휴한지 20일후 노 주교는 태도를 바꿔「종을 바치라」는 공문을 전국에 보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지만 그래도「이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텅 빈 종각을 보면서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얼마 후 우리본당담당 고등계형사가 새로 왔다며 인사하러 들렀다. 사방에서 종을 바치라고 옥신각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나는 그 형사와 한바탕 일전(一戰)을 벌일것을 각오하며 그를 맞았다. 고등계 형사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텅 빈 종각을 쳐다보더니 대뜸『아니 신부님은 종을 벌써 바치셨구만요. 잘하셨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내 작전은 성공한 것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슬쩍『그래 성당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니까 그랬다』고 둘러 쳤다. 군청에서는 나의 어설픈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나중에 내가 이웃본당 신부에게 고백성사를 보러간 사이에「종 값」까지 주겠다며 직원을 보내기까지 했다. 이미 우리성당을 제외한 신청읍내 개신교 예배당은 30~40여개의 종을 갹출당한 후였다.
이런 경로로 신천본당의종은 벽속에 고스란히 모셔 둘 수 있었지만 또다시 청계동본당의 14처 상본을 빼앗아가려해서 말썽이 생겼다. 그 본당의 신자가 내게 긴급요청을 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됐는데 종과는 달리 14처 상본은 신자생활에 필수적인 성물이기 때문에 기필코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게다가 그 상본은 청계동본당을 일으킨 빌렘(홍석구) 신부가 그림을 프랑스에서, 상본테두리는 홍콩의 한 수사에게 특별 주문해 만든 귀한 물건이었다.
본당에 찾아와 고등계형사에게 다짜고짜『두라 면소장 못생긴 놈 아니냐. 무슨 권리가 있다고 신자들의 상본을 함부로 뺏아 갔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그 필요성을 누누이 설명했다. 그리고『만약에 해결이 되지 않으면 황해도청이 아니라 서울의 총독부, 일본 땅의 경시청까지 가서라도 상본을 찾고야 말겠다』고 결의를 보였다. 괜시리 야단만 흠씬 맞은 형사는 머쓱해서 돌아갔고 정확히 10일 후 14처 상본은 청계동 공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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