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12월 2일 동틀 무렵에 묵방이(현ㆍ문경군 가은읍 왕릉리 먹뱅이)를 향해 출발. 조그만 고개를 넘어 15리를 가다가 골짜기를 내려가니 문경이다. 몹시 낮은 지대이다. 풍긔 마을은 대구의 서씨 일가가 예전에 살던 곳이다. 농바회(현ㆍ경북 문경읍 용암면 내서리 쌈용) 장터에 이르기 전에 우리는 1866년 이전에는 신자였다가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냉담자가 돼 버린 권의 집 앞을 지나다.
12월 4일 쌍룡을 떠나 40리쯤 왔을 때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멈추었다. (3시경에 대항골 주막에서). 여기도 역시 상주군 관내이다. 거기에서부터 충청도가 시작되며 곧 청주군이다. 새내 옹기마을에 5리쯤 못 미쳤을 때에 공림절이 보이고 강의 왼쪽으로는 사담(沙潭ㆍ현 충북 옥천군 청산면 만월리)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경상도에서는 10리, 청주부에서는 70리 거리에 있다.
12월 5일 새내 옹기마을에 성사집행. 교우들이 1백 20명 가량이고 불행히도 너댓 가정은 외교인이다. 이렇게 섞여있는 것이 여기서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때문에 노름꾼과 술꾼이 생기는 까닭이다. 25세의 교우 김요셉은 최근에 아내와 아이를 한꺼번에 잃었다. 외교인 하인이 그에게서 그들을 빼앗아간 것이다.
12월 11일 3시에 일어나 미사 3대를 드리다. 아침을 먹고 6시 45분에 출발. 목천 및 진천으로 향하다.
12월 12일 2년 전에 설립된 삼거리 옹기마을은 그 흙의 질이 나빠서 반정도 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어제 오는 길에 무거운 짐과 함께 홀로 남겨진 한 짐꾼이 동료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어찌나 화가 났던지 오늘 하루 종일 성사를 받으려고도, 주교와 신부를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수백번의 간청 끝에 그는 결국 저녁 8시경에야 마음을 굳히고 그와 마찬가지로 견진준비를 마친 그의 딸과 함께 고해성사를 보았다.
12월 18일 아침을 먹고 6시 반에 출발. 처음에는 길이 미끄럽고 험하더니, 다음에는 지저분한 진창길이다. 우리는 천천히 갈 수 밖에 없었다. 부엉골에서 10명의 교우가 우리를 마중 나오고 숭선의 사냥꾼 4명이 우리와 동행하다.
12월 21일 새벽에 그곳을 출발하여 30리를 오니 양근읍이 보인다. 어제의 같은 시간보다 안개가 덜하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노들 주막으로 갔다. 주막 주인은 예전엔 고추도 먹지 못하던 서양 사람들이 몹시 매움 음식을 너무나 잘 먹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와 한다. 그에게는 우리 모두가 같은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다.
12월 22일 가야할 길이 70리다. 지난밤에 아주 꽁꽁 얼어 붙었다. 하지만 한강은 반은 얼어붙고 반은 물이라서 얼음위로 건널 수도 나릇배로 건널 수도 없다. 우리는 동문에까지 닿아있는 길을 따라 한강을 우회하다. 거기에서 10리를 오니 망오리 고개(망우리고개)이다. 여기는 부엉골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렸다. 진흙투성이의 미끄러운 길이다. 아주 천천히 걷다. 집에 도착하니 4시, 부이용 신부는 보름전에 미리내로 떠났다. 코스트 신부는 건강이 좋은 상태다. 프와넬 신부는 심한 감기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성사를 주고 있다.
12월 24일 몸이 불편한 프와넬 신부가 자정 미사를 집전하다. 두번째 미사를 드린 프와넬 신부는 피로를 이기지 못해 더 이상의 미사집전을 중단해야했다.
12월 25일 예수성탄. 6시 45분에 미사. 순라군(巡羅軍)들의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남교구들은 자정미사에 참례하였다. 오늘 두세 신부는 용산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약현의 성 요셉당에서 첫 영성체 강복을 거행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