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탄압이 한참 기승을 부리던 44년 가을 나는 주재소로부터 돌연한 호출령을 받았다. 마침 가을 공소방문철이라「돌무지공소」에 나가있다가 일부러 거기까지 찾아온 인편을 통해 호출서를 받아들었다. 해방을 앞두고 일제는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서 무고한 사람들도 왕왕 잡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신부」라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때가 좋지 않았던 만큼 돌연한 호출서에「찜찜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청년시절부터 60세까지 돌무지공소 회장직을 맡아온「소회장」과 함께 호출서에 써있던 대로 5시 정각에 주재소에 도착했다. 왠일인지 주재소는 문이 굳게 닫힌 채 사람이 없었다.
이상스레 생각하면서 직접 주재소장에 사택으로 찾아갔다.
관복을 벗고 일본식「하까모」를 입은 주재소장이 직접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고 부인은 옆에 서서 수도 없이 절을 하는 것이었다. 호출서에서 느낀「불안한 예감」과는 달리 주재 소장 부부는 뜻밖에도 아주 친절했고 저녁식사 상에는「마」를 갈아서 찹쌀가루로 부친 별식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주재소장은 식사 중에『요즘 시국이 너무 위험하니 조심하십시요』라는 충고의 말까지 덧붙였다. 알고 본즉 그 호출서는 평소에 가톨릭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던 소장이 특별 조언을 해주기 위해 나를 만나지고 초청장으로 보낸 셈이었다.
내가 무사한 채로 공소로 돌아가자『구 신부님이 주재소에 잡혀갔다』며 걱정을 하고 있던 교우들은 회색을 하고 반겨주었다. 같이 따라갔던 송 회장은 옆에서 연신『구 신부님 덕택에 난생처음으로 그 무서운 주재소장에게 저녁까지 얻어먹었다』며 자랑을 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종교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대라 내가 아는 신부 중에도 스파이로 몰려 잡혀간 사람이 꽤있을 정도로 삼엄한 시대였다. 그런 와중에서 주재소장에게 특별히 친절하게 한일도 없는 내가 어떻게 그렇게 큰 환대를 받았는지는 지금까지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때부터 해방되기 까지 큰일이 없이 지내다가 45년 8월 15일 마침내 대망의「해방」을 맞았다. 15일 저녁때 라디오를 통해「우리나라가 해방됐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8시 만과를 드릴 때 까지도 영「해방이 됐다」는 실감은 들지 않았다. 이튿날이 밝아 동네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성당까지 달려오자 비로소「일본의 압제에서 이제야 풀렸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우선 헛간 벽안에 숨겨놓았던「소화데레사종」을 꺼내 종각에 달았다. 마을사람들이 마을 안에 있던『일본 놈들」의 상징인「신자(神)」에 불을 놓아 신사가 활활 타들어 가는 동안 계속 그 종을 쳤다. 해방을 알리는 소화 데레사 종소리는 신천읍을 넘어 10리 사방으로 널리널리 퍼져나갔다. 신천주민들은 이 종소리가 맑고 우렁차다며「해방종」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열심히 종을 쳐대는 내 모습이 마치 해방의 뚜렷한 상징처럼 여겨졌는지 당시에는 무척 귀한 사진기를 들고 온 한 청년이 내 모습을 촬영하기도 했다.
일제히 경찰서로 달려가 문서를 뒤진 마을 사람들은 비밀궤짝 속에서「김구선생 자서전」을 찾아 내게 가지고 왔다. 이 책은 김구선생을 잡기위해 눈이 빨개져있던「일본 놈」들이 자서전을 일어로 번역, 홍보용으로 황해도 전역의 경찰서에 돌렸던 바로 그 책자였다. 주민들은 이 귀한 책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맡길 수 없다며 내게 보관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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