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구약에서 단순히「사람」을 지칭하는(시편8, 5:80, 18)통상 관례와 달리 에제키엘과 다니엘서는 각기 예언자의 전승에 따라 묵시문학의 노선에서 사용한다. 에제키엘에서는 예언자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예언자인 그는 사람의 아들로서, 하느님이 유배중의 백성에게 마음을 새롭게 하는 새 계약을 체결하심을 선포하는 자임을 역설한다(2, 1~8참조). 그는 사람의 아들 즉 백성중의 일원으로서 나약한 존재(12, 2)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큰 사명을 맡기셨다. 다니엘(7, 13이하)에서 그 인물은 마지막 때에 구름을 타고와 끝없는 권능을 부여받을 것이며 지존하신분의 성도(聖徒)들을 대표한다. 그의 통치권은 지상의 모든 왕국에게 최후의 심판이 선언되고 난 후에 온 왕국위에 행사될 것이다. 두 예언자에게서 나타나는 인자(人子)의 뜻은 대조적이다 : 나약한 지상존재의 인간과 초월적 천상존재를 지칭한다.
사도행전7, 56을 제외하고 신약에서 예수가 직접 사용하시는 호칭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몸소 사용하신 호칭임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①종말의 완성 때에 하느님의 고유권한인 심판을 집행하러오는 인물(마르8, 38:13, 26) ②사람들과 깊은 연대성 안에 계시는 예수의 나약한 인간적 면모를 가리킨다(마태8, 20). 예수의 활동이 비극 즉 고난과 죽음으로 끝장난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하느님의 종으로 생애를 마치는 예수를 지칭한다(마르8, 31:10, 45). ③자기비하로부터 현양에 이르는 그리스도 사건전반과 관련되어 있다(요한3, 14:8, 28등). 다니엘서에서는「아담」이름처럼 집단을 가리키는 칭호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과 맺고 있는 예수의 연대성을 드러내는 데에도 사용된다(마태25, 31~46:최후심판의 비유).
장차 올 인물로 기대되었던 사람의 아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이미 왔으며 세상에 대한 최후심판을 집행하러 마지막 날에 곧 올 분이 되었다. 하느님의 전권대사로 왔던 분일 뿐 아니라 어느 정도 모든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마태25)로 다시 올 분이다. 따라서 예수의 천상적 기원과 지상존재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시사하며, 창조와 구원과 완성에 있어서 인간을 위하고 대표하며 완성시키는 예수의 광범위한 역할을 한데 묶어 드러내는 호칭이다. 창조는 그리스도「안에서」「위하여」이루어졌으므로 모든 사람이 사람의 아들인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있다.
이 관계로 인하여 인간은 하느님과 계약을 체결하고 상대하는 존재임이 명확해진다. 예수의 부활로써 하느님과 인간의 정체가 밝혀졌다. 끝까지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즉 계약에 충실함으로써 자기를 완성시켜야 할 존재로서 인간이 계시되었다. 예수는 계약의 완성을 위하여 사람으로 왔고 하느님을 대신하여 심판을 집행하고 인간들을 위한 심판의 기준이 될 존재로 자신을 이해하면서 사람의아들로 자처하셨다. 인간과 깊은 결속 안에서 또한 하느님의 전권대사로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드러내셨다.
하느님의 종
야훼에 종속되어 그분의 일에 헌신하는 종, 성실한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이다(이사42, 1~9:49, 1~5:50, 4~11:53, 12). 무죄한 의인, 하느님의 충성스런 봉사자들이 겪는 고통은 순전히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연관되어 있다.
요셉, 모세, 예레미아처럼 하느님의 출중한 봉사자들은 백성을 구원하는 일에 불리웠으므로 사명수행 중에 박해와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이 백성과 체결하신 계약은 의인의 고통을 통하여 다시 제정된다. 종은 무죄하지만 모든 이들의 죄와 그 죄의 결과까지 떠맡아진다. 자기 사명에서 피할 수 없는 혹독한 죽음에 내부쳐질 뿐 아니라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기꺼이 내놓는다. 이 봉헌은 경건한 원의에서 나온 것이지만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구원의 결실을 가져 온다:『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이사53, 5). 종은『모든 이를 의롭게 하리라』(53, 11). 인간들과의 깊은 결속 때문에 죄와 그 결과들을 대신 맡아 짐으로써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종개념은 부당한 고통을 겪는 의인의 운명에 대하여 지혜문학이 제기한 질문에 해답을 구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결론이다.
그 고통은 하느님에 의해 대속회생의 구원적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종은 특정 인물보다는 집단적 성격의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예수는 종으로 자칭하지 않으셨다. 이 호칭이 예수에게 부여된 곳은 마태오12, 18과 사도행전의 네군데(3, 13ㆍ26:4, 27ㆍ30)뿐이지만 이사야의 종에 대한 암시는 많다. 세례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마르1, 11)은 예수를 종으로 시사하며, 그 외에 예수가 사명을 종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곳은 두 군데이다.
전도활동을 마무리하실 때와 공생활을 종결하실 때 즉 수난예고와 최후만찬 때이다. 공적활동의 전환점이 되는 수난예고(마르8, 31:9, 31:10, 33)안에는 종이 암시되어 있다. 사람의 아들은 종의 운명을 걷는다:『사람의 아들도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왔다』(마르10, 45).공생활을 마무리하는 최후만찬 석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피를 흘릴 것이라(마르14, 24) 말씀하신다.
예수는 임박한 죽음을 종의 운명에 비추어 이해하셨을 것이다. 죄인들과의 깊은 유대관계 때문에, 죄를 없애고 새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종으로서 죽음을 기꺼이 수락하신다. 사도행전의 구절들은 예수의 죽음을 종에 비추어 해석하였던 초기교회의 상례를 반영한다.
종의 칭호 안에는 연대성, 대리속죄, 희생을 통한 계약의 체결 등 개념들이 내포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사건 특히 빠스카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는 부당한 고통을 겪는 의인으로 죽으셨다. 고난과 죽음으로써 죄 많은 백성의 운명에 깊이 연루되었고 백성을 죄에서 해방시키는 계약을 성취하여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을 드러내셨다.
좋은 사람 때문에 죄인인 우리의 비천한 조건을 취하였고 우리는 이 사랑 덕분에 구원받았다(요한10, 18:갈라3, 13). 좋은 자신을 무한히 낮추고 순종을 몸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종의 자기비하와 순종 안에서 하느님은 지고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는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셨다. 당신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립2,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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