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소련군이 1945년 8월 20일 원산에 들어옴으로써 이북에서의 해방은 5일만에 끝이나고 말았다. 22일 평양 23일 사리원을 거쳐 25일에는 드디어 신천읍에도 수백명의 소련군이 들어왔다. 우리들은 그때 이미 소련군의 사리원에서 천주교회회장이라는 이유하나로「은파공소회장」을 총살했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모두들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군수가 직접 나서 일본인들이 만든 담배 창고를 숙소로 내주는 등 호의를 베풀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후에 도착한 소련군은 불과 몇 시간 후 중학생 3명을 총살하고 말았다
소련군이 마을의 여자를 강간하려는 모습을 보고 중학생들이 소리를 지르자 총살시켰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소련군에 대한 신천읍민들의 막연한「불안감」을「반감(反感)」으로 뒤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주민들은 3~4일 동안 시위를 계속하며『총살한 그놈을 읍민 앞에서 총살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요청은 그대로 묵살 당했고 개신교신자로 제법 똑똑하게 자기주장을 펼친 한주민은「반동분자」라고 끌려가 1년 반만에야 고향에 돌아왔다. 당시 이북에서는「반동분자」를 일명「모자」라고 빗댔는데 왜냐하면 모자처럼 쓸 수만 있지 벗을 수는 없다고 이유에서였다.
소련군들은 낮에는 멀쩡했으나 밤 12시반 사이렌소리만 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신천 읍에 들어온 후 4일째 까지는 일본집들을 강탈했고 그 후에는 한국인 집도 서슴지 않고 덤벼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는 소련군이 우리본당에도 찾아왔다. 그들은 구두를 신은 채 성당 안에 들어가 제대위의 촛대를 꺼내 만지작거리더니 내 방까지 와서 둘러보고 있었다. 내가 하도 화가 나서 냅다『나가라』고 소리를 치자 그들은 슬그머니 가버렸는데 밤에 도둑질을 하기위해 낮에 물건을 보러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여간 조심이 되지 않았다. 얼마 후 다시 소련 군인들이 왔는데 그중에 유난히 깨끗하게 옷을 차려 입은 소련장교 하나가 나에게 라틴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가톨릭에 대해 알고 있는 듯 했다. 대화를 해보니 그 장교는 종군의사였고 자기 아버지가 「가톨릭」이라고 대답했다
이장교가 가톨릭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때문인지, 소련군이 신천읍에 머무르는 동안 내방은 한 번도 도둑맞은 일이 없었다.
또 한 번은「까피딴」이라고 불리는 소련군 헌병대장이 가톨릭신부와 면담을 하고 싶다며 나를 호출한 일이 있었다. 그는 신천교회의 내력과 교세 등을 자세히 물어본 다음 외국인들과도 만나느냐고 질문했다. 아마도 헌병대장은 당시 적국(敵國)인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시험 삼아 질문을 던진 것 같았는데 나는 솔직히『가톨릭은 로마 교황청과도 필요하면 연락을 해야 하고 미국신부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담대하게 대답을 했다. 까피딴은 가만히 나를 쳐다보더니 인사도 하지 않고 가보라고 말했다.
그럭저럭 위기상황을 간신히 넘기고 해방 이듬해를 맞았다. 이때 내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미화유치원을 자진 폐원한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보모도 없는 상황에서 시작한 미화유치원은 이때쯤 재령출신의「최마리아」자매를 보모로 맞으면서 착실히 기틀을 잡아나가는 중이었지만 내가보기에는 이대가 가장 적절한 폐원시기였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이북당국이 유치원을 강제로 폐교, 접수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하는 가운데 3월 유치원의 문을 닫고 성당으로 고치는 공사를 시작했다. 유치원 옆에 종각을 세워 올리고 벽돌을 만들어 개축해 나갔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46년 가을 장로교의 유치원을 모조리 압수당했다. 우리유치원은 건물을 성당으로 개축함으로써 다행히 당국에 접수당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훨씬 뒤 6ㆍ25사변이 발발하고 UN군이 북진할 때 내무서에 들러 문서를 찾아보니「미화유치원은「청년구락부로 사용할 예정」이라는 계획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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