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8년에 접어들자 천주교에 대한 북한당국의 입김이 더욱 거세졌다. 어제까지 머슴이었던 사람이 당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부자주인을 두들기는가 하면 지식인층이 계속 숙청되는 가운데 원산 수도원도 숙청대상이 되고 말았다. 배수사라는 사람이 반동적인 내용의 삐라를 인쇄해주었다는 협의였다. 당에 충성만 하면 살인강도라도 용서해줄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한 속에서 화폐개혁까지 단행, 안팎으로 몹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나는 이런 때일수록 교회를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주일강론시간에도『이제 공산당들이 권리를 쓰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신부님들도 얼마든지 잡혀가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면서『치명할 때가 가까이 왔다』고 강조하곤 했다. 매 강론 때마다『치명정신으로 신앙을 지키자』는 것을 강조했고 신자들도 무언가 결연한 생각을 다진 듯 대부분의 주일미사가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봉헌됐다.
이런 내 모습이 심히 딱해보였던지 어느 하루는 성당 옆에 살고 있던 외인한사람이 찾아와『신부님 주일날 강론을 조심해서 하세요. 내무서원이 와서 강론을 꼬박꼬박 듣고 일일이 적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일러주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반동분자로 낙인찍혀「숙청」을 당하는 판국이니 그의 충고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찌 신부된 도리로서 올바르다고 판단된 말을 안 하고 살 수 있으랴. 오히려 그 외교인의 말을 듣고는 더 힘을 내서 강론을 계속했다.
48년 8월 15일은 신자들에게 독특한 기억을 남겨준 날이었다. 「해방 기념일」이라 해서 하루 종일 행사가 열렸는데 낮에는 당원들을 중심으로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며 난잡하게 소리를 질러댔고 저녁에는「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어떤 영화를 상연한다고 떠들썩했다.
그날은 우리 교회에서도 큰 축일인「성모승천대축일」날이라 공소에서도 평소보다 많은 신자들이 찾아왔다. 미사강론을 하던 중 9시 30분쯤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에 없이 엄청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므로 신자들은『이것은 보통 비가 아니다. 공산당들 해방 기념행사를 막기 위해 오는 비』라고 쑥덕거렸다. 그러나 비가 계속 쏟아지면서 해방 기념행사뿐 아니라 2시로 예정된「성체강복」도 하기 어렵게 될 것이 문제였다.
그때 나는 어디서 힘이 났던지 이 비는 성모님께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벌로 주는 비라고 말하면서『오후 2시에는 말짱하게 갤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성체강복에 나오라』로 확신에 찬 예언을 하고 말았다. 먼곳에서 온 공소신자들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각자 숙소에 머물며 2시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2시가 됐을 때 밎어 지지 않을 정도로 하늘이 맑게 개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한구석에서는 걱정을 하고 있던 나 역시 그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체강복을 마친 오후 6시까지는 비한방울 내리지 않는 맑은 날씨가 계속됐다.
아침나절에 비가오자 해방절 행사를 망쳤다며 투덜거리고 있던 당원들도『비가 그쳤으니 됐다』면서 오후의 영화 상영에는 돌아다녔다. 그러자 신가하게도 오후 7시부터 다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노천극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비가억수같이 쏟아지자 영화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방절행사는 완전하게 실패한 셈이었다.
「하늘에서 개울물이 내려온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던 그 비는 이튿날 새벽까지도 계속 내렸고 구월산꼭대기에서 산사태가나서 그날 밤 수백명이 죽음을 당했다. 주민들은『그놈들이 하늘이 벌을 받은 것』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이튿날 신천에서 사리원까지는 물바다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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