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거행은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그것이 성찬을 거행하는 이들에게 근본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주 예수에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성찬 거행은 거행자들을 변혁시켜야 하고 보다 깊은 이해와 되살아난 기운, 활기찬 희망을 띠고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강회 시켜 주어야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확실히 육화가 내포한 뜻과 하느님 자신의 영이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는 현장에서 도피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계속되고 있는 세계의 구속 상업에 관여할 당연한 책임에서 도피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 삶은 인간의 소외와 철저하게 맞서는 것을 포괄하여, 그 목표는 환상과 거짓ㆍ기만을 파헤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찬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주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한다. 그분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기분을 설정해 준다. 또한 그 분은 그 기준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부여해 주신다. 우리는 역사의 예수의 삶을 그분의 인성을 통하여 창조자요 구원자로서 당신을 계시하신 하느님을 신실하고도 기꺼이 섬겨 사셨던 삶으로 이해한다.
예수께서는 날마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요청하신 것을 행하시고자 하셨다. 그분의 삶은 죽음에 이르는 바로 그 순간까지 그분 자신에 의해 취해져서 영위된 책임 있는 결단으로 점철되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가운데, 그 의지 중에는 그분의 백성과 연계된 것이 있음을 깨달으셨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분이 사시는 것과 같이 살도록 힘을 부여해 주심으로써 -일치와 평화, 정의와 사랑 속에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 자신이 파악하였고 또 설교 중에 선포했던 왕국에 대한 위대한 비전이었다. 결국 왕국의 도래에 대한 희망에 중심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교적인 삶은 개인주의적인 것을 수도 도피적인 것일 수도 없다. 여기서의 희망은 예수를 통하여 인격 주체적이요 공동적인 모습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하느님의 모습에 닮게 창조된 개인 주체와 공동체 모두를 위한 희망인 까닭이다.
영의 힘에 의해 예수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나누는 일치ㆍ결합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사시는 대로 살고, 그분이 보시는 대로 보도록 해주신다.
오늘날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것 중의 하나는 예수의 시각(視角 vision)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예수께서 보시는 대로 본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인 관상(觀想)이 뜻하는 모든 것이다. 그분의 시각을 함께 나눔으로써, 곧 그분의 시각으로 봄으로써 우리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사건들의 배후를 볼 수 있고, 많은 인간 제도들이 띠는 환상과 기만적 요구들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덧없고 즉각적인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 지속적인 것을 볼 수 있다. 참된 그리스도교 관상가들이 불의에 대한 커다란 위협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예수의 시각을 자기 것으로 하고자 애쓰는 그리스고인들은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뿌리를 본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게 된다. 이러한 관상이 바로 인간의 마음속 깊이에, 그리고 사회의 구조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에 맞서는 싸움에 뛰어들기 위한 불가결한 요건으로서, 개인 주체와 공동체의 해방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바울로가 필립비인들에게 지적하였듯이 악에 대한 항거는 오로지 인식과 통찰의 폭에 따라 터져 나올 수 있을 따름이다(필립1, 9). 불의와 소외는 한계 지어진 이해, 행동하기를 꺼려한다든가 그럴 수 없는 상태로 하여 영속되는 것이다.
한데, 그리스도의 시각을 발견한다는 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시도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행함으로써 역시 배우기도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과 이어지며 그분을 믿는 것은 그분 아버지의 뜻을 기껍게 행하는 것을 내포한다. 복음서에서 볼 때 고난을 겪는 것과 행하는 것에 대한 복종ㆍ순명은 분명하게 통찰된 이론적 시각의 포착에 우선하는 듯싶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이해와 하느님에 관한 그분의 계시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는 참으로 진실한 제자 됨을 나타내준다. 그리스도께 가차 없이 비판된 상태 중에 한 가지는 그분에 대한 인간 차원에서의 눈먼 상태였는데, 그분이 고쳐주셨던 신체적인 눈먼 상태가 아니라 회개하지 못하는 데서 온 영리적 눈먼 상태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한 눈먼 상태는 묘하게도 귀머거리, 즉 백성에게 회개하도록 요청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꺼려하는 상태에 이어져있다. 회개란 새로운 믿음 체계라든가 새로운 예배형태를 받아들이는 그런 것이 일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과는 다르게 관계를 맺어 나가는 식으로 하느님과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을 뜻한다. 회개는 정의롭게 사는 문제인 것이다.
정의는 성서에서 볼 때 우리는 혹 이렇게 이해할지는 모르겠으나 평등주의라든가 공정하게 처신하는 것에 관한 그런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예로서, 포도밭 일꾼들에 대한 비유에서의 경우『공정하지』않으시다. 정의에 대한 성서적인 이해는 생활(을 함께 나누는)공동체를 내포하는 것으로, 배제되어있는 모든 이들에게로 향해 가 닿음과 자신이 갖는 것 일체를 그들과 함께 나눔을 뜻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정의로써 그분 삶에서 배제되어 있는 우리 죄인 모두에게로 향하셔서 그분과 더불은 친교ㆍ합일(Comminion)을 허락해 주신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에게 우리의 친교(합일)에서 배제된 모든 이들을 위해서도 이와 똑같이 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하시고 또 요청하신다. 『만일 하느님이 하느님이시고 한분이시라면 그분의 백성은 그들을 백성으로 형성하신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고서는 나누일 수 없을 것이다』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영의 힘입어 사는 것은 다른 양상으로 투신한 제자들하고는 물론이고 친교 공동체에서 배제된 모든 이들과도 함께 자신의 삶을 나누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부자의 스캔들은 부자 쪽이 부유하고 다른 편이 가난한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만일 누구나가 다 평등하게 넉넉해지면 삶이 정의로워 질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케빈 시솔프 신부는 미국 베네딕또회 소속 성 안셀모 수도원 수사신부로써 현재 미국 가톨릭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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