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에 들어서자 남북 사이에 가로놓은 38선에 대한 경계가 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그래서 48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직접 가져오던「첨례표」를 더 이상 가지고 올수 없게 됐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나름대로 재주를 발휘해 직접 첨례표를 만들어 쓰기로 했다. 옛날 첨례표는 지금과는 달리 현재 신문지보다 조금 더 큰 한 장짜리 표였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던 등사기로는 도저히 그 크기의 첨례표를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등사기를 개조해서야 첨례표를 만들 수 있었다. 첨례표를 다 만든 후에는 그냥 그대로 등사기를 책상 밑에 밀어 넣어 두었다.
물론 이때까지는 예상도 못했었지만 나는 얼마 후 이 등사기 때문에 예상도 못한 고초를 겪게 됐다. 그냥 무심하게 방치해두었던 이등시기가 나를「반동분자」로 몰고 가는 하나의 유력한 증거자료로 활용된 것이었다.
첨례표를 만들어 교우들에게 돌리자 내무에서는 나를 호출하더니『왜 등사기가 있다고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쳐물었다. 이 조사는 3일이나 계속됐다. 나는 그저『특별히 신고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대답했고 이 조사자체에 대해서도 무슨 「꿍꿍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날 하루 종일 내방을 비울 일이 생겼다. 10년을 냉담한 교우가 특별히 청한 종부성사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이날 누군가가 방에 들어와 등사기를 조작한 것 같다. 내무에서 끌려갔을 때 그들은 증거자료로 내 등사기계로 인쇄한「반동 운동격문」과 등사기에 고스란히 붙어있던「원문」을 제시했는데 등사기에 대해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나는 그때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던 이일은 나를 요주의인물로 보고 있다는 북한당국의 태도를 바로보여준 것이었다. 이미 나는 48년 성탄첨례 때 황해도본당에서는 처음으로 당국이 금지하고 있던「연극공연」을 감행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를 반동분자로 몰아 숙청하기위한 계획의 하나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그 다음에 생겼다. 월남하려는 중학생1명에게 길을 일러준 사실이 발각된 것이었다. 그들은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신자학생으로 평소에도 내방에 자주 찾아오곤 했는데 어느 날『이제는 더 이상 북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며 남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그중 한 학생은 진화론을 설명하는 선교사에게『왜 지금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없나냐』는 질문을 던져 교장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부모님과 의논을 한 다음에 결정을 내리라고 말했고 다음날 그들은 부모의 허락이 떨어졌다며 다시 찾아왔다. 세밀하게 그림까지 그리면서 내가알고 있는 길을 일러주었다. 두 학생은 이튿날 미사참례를 마치고 하직인사를 한 후 그길로 떠나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알지 못하는 중학생 4명이 나한테 찾아와서는 어제 월남한 학생이 2명이 그만 해주에서 잡혀버렸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내가 길을 일어준 것은 그 학생들과 나만이 아는 일인데 어떻게 이 학생들이 나를 찾아온 것일까 라는 의문을 품고는『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나한테 왔느냐 너의 교장선생님께 가서 먼저 알리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길을 잘못 일러주어서「그 애들이 잡힌 것은 아닐까」「등사기 건을 비롯해서 이놈들이 나를 한꺼번에 반동분자로 몰로 가려는 수작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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