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열두시쯤 되자 어두움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다. 태양마저 빛을 잃었던 것이다. 그러자 성전 휘장 한가운데서 찢어져 두 쪽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하고 부르짖으셨다.(루까, 23장 44~46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서의 기쁜 소식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사건을 통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스라엘은 인류구원사가 드디어 완성을 이루는 엄청난 사건의 생생한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약속과 구원의 땅 이스라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 인류와 맺은 새로운 계약의 땅 이스라엘로의 행군은 생각보다는 수월한 편이었다.
「사나이」반도를 거쳐「예일랏」만을 따라 올라온 취재일정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현장, 이스라엘의 작은 항수「예일랏」으로 연결됐다. 모세가 출애굽 당시 백성들을 이끌고 지나간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예일랏」은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러「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통과했다는 일설이 전해지는 지역이기도하다.
버스 편으로의 이스라엘 입국은 약간 수월한 듯 했지만 긴장감은 여전했다. 도착 바로 이틀전, 팔레스타인 제2인자이자 지도자인 아브지하드가 류니지아에서 암살당한 사건이 그 긴장감의 주범이었다. 정령지마다 발발하는 데모와 소요로 비상사태에 들어간 이스라엘 땅 전역은 무장군인들의 날카로운 눈초리로 압도당하고 있었지만 취재와 순례에는 별다른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선물 받은 것이 없는가』『짐을 스스로 챙겼는가』『짐을 혼자 버려두지 않았는가(낯선 사람에게 맡긴 적이 있는가)』이스라엘에 발을 디디는 모든 외국인에게 적용되는 질문들이 어김없이 주어졌다. 첫 번째 방문자들을 긴장시키는 이 질문공세는「약속의 땅」을 지키기 위해 주변국들과 첨예하게 대치해있는 이스라엘의 오늘을 있는 그대로 실감케 해주었다.
서아시아 지중해연안 동쪽 끝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국가건립은 1947년. 48년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쟁취한 이스라엘독립은 올해도 꼭 40주년이 된다. 바로 며칠 후면 독립 40주년기념일을 맞는 이스라엘은 아브지하드의 피살로 야기되고 있는 이스라엘점령 아랍지역의 소요 속에서 조용히 축제를 펼치고 있었다.
하느님과의 약속이 실현된 구원의 땅, 이스라엘은 고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분쟁이 쉴 사이 없이 이어진 피의역사로, 아픔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극적인 역사의 반복 속에서도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메시아왕의 출현.
이스라엘백성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내 야훼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 중재자가 된 모세로부터 예수그리스도를 곧바로 연결시키기에는 참으로 큰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구약이 예언한 유대의왕 메시아의 출현은 너무나 엄청난 역사적ㆍ시간적 공간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하느님백성의 구원자이며 시나이계약을 중심으로 한 구약의 완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은 전세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마음을 이곳이스라엘로 모르고 있는 핵심이 된다.
이스라엘의 일정은 참으로 바빴다. 5박 6일이라고는 하지만 입국과 출국 일을 제한 나머지나흘 낮과 밤이 우리에게 주어진 순례시간의 전부였다. 한곳이라도 더 보고자하는 마음들은 한결같아 그 짧은 일정동안 우리의 행동반경은 전 이스라엘을 누비고도 남았다.
성서속의「소돔」과「고모라」의 현장「소돔」, 이스라엘의정신교육장이자 자존심의 상징인「맛사다」, 국민학교 교과서를 통해 그 효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사해」,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숨었던 곳이라는 오아시스「엔게디」를 거쳐 양치는 소년이 우연히 찾아낸 항아리속의 성경, 꿈란 사본의 발견 장소인「꿈란」을 거의 하루 만에 섭렵했다.
『의인 10명만 있어도 멸망치 않겠다』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생생하게 떠오르는「소돔」, 단10명의 의인이 없어「소돔」은「고모라」와 함께 불에 태어지고 멸망하게 된다. 성 범죄의 극치를 이루었던「소돔」의 역사를 묵상하면서 말없이 죽어가는 오늘 우리 사회의 무수한 태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해를 왼편으로 끼고 험준한 광야를 달리자 갑자기 만나게 되는「맛사다」는 70년경「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이스라엘 독립운동의 마지막 항쟁터이자 최후의 보루. 영원한 자유를 찾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사람들의 혼이 서려있는 이 천역의 요새는 이스라엘 정신을 한눈에 읽게 하는 증거의 장소이기도 하다.
사해는 진짜 물에 뜨는가를 시험해 보려는 호기심 많은 관광객, 순례자들로 북적거렸다. 지상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마이너스3백92m)사해의 염도는 26%정도. 2백20억t의 염화마그네슘이 녹아있는 것을 비롯, 각종 화학물질이 녹아 농축되어있는 사해는 이름과는 달리 공업원료를 생산해내는 자원의 보고로 아낌을 받고 있었다.
「예루살렘」입성은「베틀레헴」에서부터 열기로 했다. 프란치스꼬회 소속으로 성지를 지키는 유일한 사제 안선호신부의 안내를 받아 순례단은「베틀레헴 예수성탄 지하성당」에서 감격의 미사를 봉헌했다. 예수아기가 탄생한 바로 그 지점, 「별자리」에는 각국의 순례자들이 단 한 번의 입맞춤을 위해 불평 없이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할 수 없이 비천한 모습의 탄생, 그 현장에서 우리 순례자들은 다시 한 번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말구유에서의 탄생 그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드디어「예루살렘」입성, 「베틀레헴」에서 맛본 예수탄생의 기쁨은 구세사의 정점을 이루는 예수수난과 죽음 부활의 현장까지 이어질 수는 없었다. 「예루살렘」입원에 산재해있는 성지 대부분은「베틀레헴」과 몇 곳을 제외하곤 거의 그리스도수난사와 직결되어 있는 고통의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67년 6일 전쟁 때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은「예루살렘」은 실질적인 이스라엘의 수도.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곳, 극심한 고통 중에 죽음을 당하시고 약속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곳, 이 땅은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는 위대한 성지, 마음의 고향이 아닐 수 없다.
새 생명의 약속이 이루어진 신앙의 고향이지만 36번씩 정복당하고 무수한 공격을 받으면서 10번씩 파괴되었던 역사적 사실은 파업으로 문을 닫고 총성이 멈출 날 없는 현실과 더불어 순례자들의 아픔이 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순례는 올리브동산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정석, 이 정석에 따라 올리브동산「예수 승천성당」을 찾았다. 작은 돔 모양의 이 성당은 현재 회교도에 속해있어 예수승천대축일에만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안타까움의 장소가 되어있었다.
예수께서 자주 찾아와 묵상과 기도를 바친 올리브동산에는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그 자리에「주의 기도 성당」이 소박하게 서있었다. 올리브산에서 약1백50미터 아래 기슭에 자리한「겟세마니 동산」에는 아름다운 성당이 순례자들을 맞았다. 예수께서 수난전날 밤 새워 기도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세워진「눈물ㆍ고뇌의 성당」이다.
올리브산, 겟세마니 동산을 거친 순례일정에서 십자가의 길은 예루살렘순례를 마무리하는 순례중의 순례나 할 수 있다.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갈바리아 산까지의 길목, 그 길을 따라 오르는 순례자의 마음은 아프고 안타깝기만 했다.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상점들, 지저분한거리, 떠들썩한 소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고통에 동참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갈라비아 언덕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주의 무덤성당」과의 만남은 작은 충격 속에 이루어진다. 극심한 고통중의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온전히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 고독하게 숨을 거두시고 묵히셨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출하신 사건의 현장은 인류구원의 역사적 장소가 아닐수없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시나이 계약을 중심으로 한 구약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이스라엘 순례는 이 갈바리아산 골고타가 정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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