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인간은 신체와 정신으로 구성된 존재라고 한다. 인간은 물질적 욕구와 정신적 욕구로 살아간다. 그러나 정신적 가치가 물질적 가치보다 우위에 있을 때 사람의 삶은 인간적인 것이 된다.
현대인은 물질적 욕구에 포만하면서 극심한 정신적 공허에 허기져 시달린다. 이 정신적 공허는 현대인들을 기술에 의존한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생활로 채우려 한다.
이런 상태는 인간을 더욱더 비인간화로 몰아간다.
과학기술
현대세계는 과학기술에 의해 지휘 조종되는 세계이다. 어떤 면으로는 이 기술시대가 지난 수세기 동안 계몽주의의 사고가 추구하여 오던 종교ㆍ형이상학 또는 윤리까지도 필요 없는 세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만이 인간의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는 시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전에 상상조차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를 인간과 자연에 제기하여 놓았다. 따라서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달 앞에서 한편으로는 인간 미래에 큰 희망을 걸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큰 위구와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AIDS는 첨단 기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기술로 오만해진 인간, 인륜과 천륜을 거역한 인간들에 대한 자연의 보복, 창조주의 응징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기술공학의 발달과 현상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문명의 발달은 윤리 및 도덕의 조화있는 발달을 아울러 요청한다. 현시점에서는 불행하게도 윤리 및 도덕의 발전이 항상 뒤에 처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놀라운 진보에도 불구하고 이 진보가 크게 불안을 야기 시키지 않을 수 없다.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본래적 인간의 의미는 기술에 대한 도덕의 우위(사물에 대한 인격의 우선ㆍ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이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이 가치질서가 전도될 때 인간은 비인간화되며 불안해진다.
가치문제는 근대, 현대 철학에 있어서의 주요한 테마이다. 가치는 인간고유의 영역이다. 즉 인간의 삶과 자유로운 결정에 가치가 성립된다. 존재론적 선(善) 즉 욕구될 만한 존재 안에 있는 선성(善性)을 지성이 인식하고 자유의지가 그것을 얻으려하는데 가치가 성립된다. 따라서 가치의 최종 근거는 인격의 품위 즉 인간의 정신적 본성에 있다. 때문에 윤리적 가치, 문화적 가치, 학문적 가치, 자연과학적 가치, 경제, 정치적 가치 등은 인격적 가체에서 풀이 되어야 한다. 성 아우구스띠노가 고백록에서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향하게 창조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 있기까지는 안정치 못 합니다』하고 한 깊은 존재론적 안정의 말은 역시 오늘에도 가치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의미하는바가 크다.
인격주의와 정신철학
우리 시대의 인격주의 철학과 정신철학은 기술 만능주의 사상에 대항하여 초기술 개념을 이끌어 들인다. 초기술의 본래의 장은 신비의 영역이며 은총의 영역이다. 이것은 또 성스러움 거룩함의 문제이다. 인간심성의 근저에는 성스러움이 자리잡고 있으며 때에 따라 성스러움 거룩함의 심정이 드러난다. 이 거룩함의 말살은 본래적 인간의 비인간화이며 인간성의 황폐화이다. 인간은 자연의 웅대함 앞에 설 때. 새로운 생명의 출생을 볼 때, 죽음 앞에 설 때. 성스러움 신성함 경건함을 느낀다.
기술은 초기술에 종속되어야 한다. 존재의 영역은 신비의 영역이며 성스러움의 영역이다. 따라서 소유의 영역인 기술은 존재의 영역인 초기술에 봉사해야 한다. 이때 인간은 본래의 가치로 있게 된다. 사실 경험적 연역에 나타나는 성스러움 거룩함의 심정은 그 근저에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거룩함에 근거한다. 이렇게 자연적 성성은 종교적 의식과 결부된다.
인격은 의식주체가 가치 특히 도덕적 가치를 파악하고 자유롭게 그것을 실현하는데서 성립되며 완성된다. 다시 말해 이런 정신 철학은 완성을 도덕적 소명에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비인격적인 물리적 카테고리에서 설명할 것이 아니라 초 기술적인 차원인정신적 가치에서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지성은 물질세계, 기술세계를 정신적, 인격적 가치로 넘는다.
우리 사회의 현실적 문제
정의와 평화, 민주화는 아마도 20세기 후반기의 인류의 공통 표어이며 목표로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현대 세계에 있어서 이 문제에 관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자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가톨릭교회는 근년에 이르러 정의와 평화에 관해 많은 의식화 운동을 일으켰으며 또한 최근에는 민주화 운동에 깊이 관련되었다. 물론 교회의 이런 적극적 민주화 운동은 찬성과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고 교회 내외에 적지않은 물의를 일으킨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군인과 정치인, 종교인이 서로의 고유영역을 분간할 수가 없을만큼 정치에 깊이 엉켜 간여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종교가 정치나 경제가 윤리적면에서 잘못될 때 수수방관만 하여도 안되는 것이며 정당한 발언을 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주화는 분명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민주화는 인간이 기본권을 보장받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이점에 대한 종교의 가르침은 불편부당(不偏不黨])이어야 한다. 종교가 너무 어떤 정당과 유착인과 밀착되면 공정성을 잃어버리고 편파적으로 흐르게 되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악인으로 몰아갈 위험이 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모든이의 사목자라는 입장에서 이탈하기 쉽다. 교회는 어떤 경우든 투쟁과 폭력의 장이 되어서는 안되고 화해의 장이 되어야 한다.
또한 특히 교계는 외부에 대해 민주화를 강력히 요구하는 것 못지않게 자체내의 민주화ㆍ민의 수렴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이점에 있어 로마 교황청은 그 오랜 역사적 경험때문인지 매우 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권 주장과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한다는 선에서는 매우 강한 발언과 명백한 가르침을 제시하지만 특정주의나 특정 국가를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
이점은 이 땅에서 종교가 정치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행동할 때 표본으로 삼을만하다.
가톨릭 국가들인 남미 여러 나라들과 필리핀이 저렇게 민주화가 잘 되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부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의 이런 결과를 가져오기에 앞에 가톨릭교회가 훌륭한 가톨릭학교들을 통해 20여년 동안 2차 바티깐공의회의 정신을 따라 사회정의, 평화, 인권, 민주화 등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다. 그곳 교회들은 이런 기초 작업을 통해 오늘의 민주화를 평화적으로 이루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땅의 가톨릭교회도 이 민족의 인권보장과 민주화에 올바른 빛을 제시하여 신도들로 하여금 올바를 세상 질서건설에 적극 참여하도록 계속 이끌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남을 고쳐주겠다고 큰 소리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내부를 성찰하고 기도하며 깊이 회개하고 소리없이 자기를 희생하여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당장 눈앞에 정치적, 정권적 차원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도 값어치 있는 일이지만 더 나아가 널리 민족 문화적 차원에서 폭넓게 세상사에 관여함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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