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거론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옛날 같으면 자색으로 덮힌 예수님 모상이나 14처, 그리고 사제의 제의를 통해 시각적으로 먼저 절기가 바뀌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마음자세 또한 바짝 긴장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단식과 금욕을 매번 지켰고 희생과 보속도 더 많이 행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제2차 「바티깐」공의회 이후 교회는 본질이외의 장식을 되도록 없앨 것을 권장해왔고, 막연한 희생이나 감상적인 고행, 극기를 억제해왔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 이르러 희생과 극기, 고행의 행위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의 죄악을 행동으로 보속하는 것이 반인간적이고 구시대적인 유물로 간주하는 무의식적인 합의가 알게 모르게 이뤄져온 것 같다.
단식과 희생 그리고 극기를 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 앞에 지은 우리의 죄악을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보속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이에는 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희박해져서 자발적으로 보속하려는 경향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하느님 앞에 빚진 것이 별로 없다, 혹은 그렇게 많은 죄를 지은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차츰 증가되어 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할 수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바로 여기서 우리는 뒤를 한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 생활이 지난 20~30년보다 죄를 덜 짓고 깨끗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사회 전체의 정신자세와 행동거지가 과연 올바르고 정의로운가?
감히 누가 오늘날의 우리를 태도가 옛것보다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죄 중에 사는 우리 인간이 죄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큰 착오 속에 살고 있는 것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하느님께 죄송스러운 일을 하였다는 것에 대해 깊은 통회를 느낀다는 것은 곧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하느님은 절대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신다. 호세아가 바람난 자기부인을 용서해주고 다시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베품 그 이상으로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아껴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듯이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듯이 하는 그런 사랑이 우리 쪽에는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점차 식어가고 있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한마디로 우리 인간의 오만 때문이라 지적할 수 있다.
현대인은 옛날과는 달리 기술과 문명으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생명이 하느님께로부터 전적으로 종종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하느님께 귀속되어있는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사회가 이렇듯 악에 물들도록 방치된 것에 대해 진정으로 뉘우치고 통회하는 자를 나는 아직까지 본적이 없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중 어느 누구가 하느님에 반하는 죄악을 범했다면 공동으로 그 죄를 고백하고 함께 통곡하면서 용서를 청했고 속죄의 제사를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하고부터는 사정이 달려졌다. 물론 사람수도 증가하고 사회도 복잡해졌지만 속죄의 의식이 완전히 겉치레의 형식적인 외부행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풍조를 신랄하게 고발ㆍ경고했다. 그들은 어느 한 사람을 대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향해 공동의 통회를 요구했다.
지금 우리사회는 나만의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악도 함께 짊어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타인의 죄, 공동의 죄를 대신 보속하는 그런 사람을 야훼의 종이라 불렀다. 뭇사람들이 축적해 놓은 죄를 홀로 짊어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타인의 죄, 공동의 죄를 대신 보속하는 그런 사람을 야훼의 종이라 불렀다. 뭇 사람들이 축적해놓은 죄를 홀로 짊어지고 그것을 갚겠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놓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예수가 어떻게 살았고 그가 행한 보속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통찰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죄악에 대한 감각을 잃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새로이 깨어있어야 하고, 그리하여 알게 모르게 저지른 많은 죄악을 마음깊이 통회하여야겠다. 나아가 우리가 해야할 바를 깊이 인식해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동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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