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스캔들은 부가 부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요청에 대해 담을 쌓아버리고 이로 해서 본질적으로 나누이는 상황을 창출하게 하는 거짓된 안정감을 제공해 주는데 있다. 하느님의 정의에 따라 살고자할 때 우리는 곧 가난한 이들이 처한 문제만이 아니라 부자들이 처한 문제들과도 역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눈멈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눈멈으로부터도 고통을 당할 수가 있다. 제도적으로 눈먼 상태는 개인이 회개하도록 요청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더군다나 분명한 시각이 변혁된 행동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이는 이들로서 반드시 행해져야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지만 두려움, 혹은 용기 부족, 혹은 무고관심이 그들이 행동하는 것을 못하게 만든다. 또한 그렇게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는 세계를 변화시킬 힘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경우 하느님의 정의에단지 부분적으로만 참여할 따름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이들은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사악함의 신비가 그들의 존재보다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사야는 정의의 길은 주님이 신선한 양식과 포도주를 그분 백성에게 마련해주시고 그들의 눈물을 일체 닦아내주실 안전한 산(이사25%6~8)으로 나있다고 선포하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전혀 피난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신실한 제자들이있다. 이들의 몸은 녹초가 된 상태이고 얼굴은 수척하다. 이들은 예수에 의해 간직되었던 하느님의 길과 세계를 위한 정의와 평화의 꿈에 민감하다. 이에 인간의 마음과 세계 구조 내에 줄기차게 만연해있는 사악함에서 그들은 고통에 찬 좌절을 체험 한다….
세계 내에서, 그리고 예수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조차 불의가 위세를 떨칠 때 잔치 자리라고 하는 하느님 왕국에 대한 이미지는 시험대에 올려져서 그 진위가 물어진다. 그럴 때 지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제도적인 폭력과 은근한 무관심으로 하여 냉소적이게 되거나 환멸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럴 때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에 신실하지 않으면 안 되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확신을 관철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때가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이미지가 재해석되어야할 때인 것으로, 희망의 빵이야말로 우리가 먹을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마련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그리고 하느님 혼자만이 세계를 불의로부터 구해내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희망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교신앙의 실질적인 기준은우리가 어떤 교의를 믿는가가아니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희망하는가 하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힘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그분의 삶과 같은 것이 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모습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육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성사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것을 하는 바의 성사이기도 한 까닭을 발견해 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성서는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의 한 일대기를 취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분은 구체적이고도 특수하며, 나름대로 고유한 사회ㆍ경제ㆍ정치세계에 위치한 인간이야기를 취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음서의 가르침과는 역행되게도 우리는 예수를 정치적소요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려져서 사제들이 거행하는 제의라고 하는 구분된 세계에 위치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복음서를 면밀히 살펴볼 경우 우리는 그분의 삶과 가르침 전반이 좁은 의미에서의 종교하고는 거의 혹은 전혀 관련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무거운 세 부담에 짓눌린 상태에서 투쟁하는 백성, 로마 당국의 압제 하에 지배당하고 있던 백성들 속에서 사셨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그분은 권력과 소유에 대해서, 인간의 성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공동체가 세워질 수도, 파괴될 수도 있는 방도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분이 마음 쓰셔서 한일들 중의하나는 그분이 몸담고 계신 사회내의 불의와 억압을 송두리째 벗겨내는 것이었다. 그분은 일차적으로 종교 예식 영역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분의 백성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계시해 주셨던 것이다. 우리가 만일 예수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다시 이야기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삶을 기분의 영께로 개방시킴으로써 우리자신의 삶을 그분과 일체화시켜 나간다면, 우리의 삶 전부를 다하여 그 삶이 사회ㆍ경제적ㆍ정치적 상황에 처한 것으로 육화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분이 당신 아버지를 향하여 취했던 자세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그리고 백성들에 대하여 취했던 자세까지도 그대로 취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은 영의 이끄심으로써 가난한자와 억압당하는 자, 고통 받는 자들과 동일 시 된다는 것을 말하며, 그들과 더불어, 그들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을 말한다.
육화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하지만 가장 편치 않은 측변중의 한 가지는 예수께서 특히 가난한자들과 동일시 하셨다는 것, 그들을 가리켜 특권적인 당신왕국의 상속자들이라 하셨고, 그들 편에 서셔서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에 맞서 지켜주셨다는 것, 이점이다.
그분은 그들에게 구원을-죄로부터, 그리고 모든 죄의 영향으로부터의 구출을 약속해주셨다. 여기서 가난한 자들이란 힘없는 자들, 따라서 경제, 정치, 사회, 문화 혹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내놓여진 한계상황에 처한 이들 모두를 포괄한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즉 각적인 구조를 베풀어주시지 않고, 그들의 삶이 복받으리라고, 행복한 마침을 누리리라고 보증해주셨다.
그렇다면 그분이 가나한자들과 동일시하신 바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비움으로서, 이로하여 그분자신이 당신의 신적인 권능과 자기-충족을 뒤로하시고 인간적인 가난한 축도인 종을 닮은 모습을 취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가난해짐으로써, 가난한자들이 하느님 생명의 부유함으로써 부유해지게 될 수 있었고, 하느님과 그분 백성간의친교ㆍ일치를 체험하게끔 들어 놓여 질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야훼의가난한 자들, 아나빔(anawim)에게서 오셨는데, 이들의 몫이란 바로 하느님이요, 그들의 삶은 하느님 혼자만이 제공해 주실 수 있는 저 친교ㆍ일치에로 열려져있다. 이렇게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심으로써 그분은 부자와 가난한 자들 모두에게 인간의 성취가 세상이 경제적, 정치적, 지적, 문화적 위엄에 비추어서 성공으로 알고 있는 그와 같은 인간적인 성공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수 있었다. 그 성공은, 하느님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친교공동체를 이루시는 그분,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우리가 지어졌으니, 모두가 일치체 라는 것을 깨닫는데 달려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우리 자신에 관한 근본적인 실재(實在)는 우리가 친교공동체인 것』이라는 사실을 계시하기위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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