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미래상과 직결
가톨릭신문은 한국천주교회의 유일한 주간지로서 1927년 4월 1일에 창간되어 이제 그 회갑을 기념하게 되었다.
가톨릭신문은 한국 교회와 함께 60여 성상을 함께해오며 그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기쁨과 희망을 함께 나누어 왔다. 물론 우리의 교회가 걸어온 지난 60년의 세월이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듯이 가톨릭신문 60년의 생애도 결코 순조롭지만은 안았다. 그 60년이란 세월 안에는 장기간에 걸친 휴간의 아픔도 있었으며, 신문제작에 수반된 적지 않은 고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이제 가톨릭신문은 60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성숙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당당히 서게 되었다.
교회 내에서 한 신문이 창간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만한 일이다. 교회신문의 창간이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신문이 창간된 후 60년을 지속해 왔다는 것도 경하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창업못지 않게 수성(守成)이 중요한 것이며 두 세대에 걸쳐 이 땅의 신앙인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그들의 신앙을 키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간 60주년을 맞이하여 가톨릭신문에 응분의 경의가 표현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 60주년이라는 뜻 깊은 시점에 서서 60년의 연륜에 자족하며 그대로 머물수만은 없다. 이에 우리는 가톨릭신문이 걸어온 지난날들을 반추해 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확인하고, 지난 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미래상을 찾아보려한다.
가톨릭신문의 미래상은 모름지기 우리 교회의 미래상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교회를 바람직하게 가꾸고자하는 소망을 걸고, 이를 위한 교회 언론의 사명을 생각하며, 미래의 가톨릭신문에 대한 기대를 적출해 보고자한다.
민족복음화 선도
지난날 가톨릭신문은 「소식보도」와 「의견교환」그리고「보조일치」를 표방하며 창간되었다. 신문의 창간사에서 밝힌「소식보도」한 지역교회의 소식을 정확히 전달하여 교회가 발전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다는 말이었다. 두번째의 목적인「의견교환」은 교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지혜를 모으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보조 일치」란 신도들의 단합을 통하여 교회가 추구하는 목적을 이루어 나가겠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었다.
창간 사이에서 제시된 이 목적들을 다시 검토해 보면 가톨릭신문의 창간자들은 교회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신문이 되기를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신도를 위한 신문이 되겠음을 동시에 다짐하며, 『느린 걸음을 빨리 가게 해주기』를 독자들에게 당부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신도들의 활발한 참여를 통해 교회의 발전을 꾀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좋은 목적과 포부를 가지고 1927년에 창간된 신문은 창간 이후 6년 동안 꾸준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 신문은 1934년 당시 한국 주교단의 결의에 보조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잠재우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 신문은 1949년에 이르러 15년간의 긴 동면에서 깨어나 속간되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신문의 속간사에서는 창간의 정신을 거듭 확인하며, 신문의 3대 목표로「소식보도」와「보조일치」그리고「조국성화」로 내세웠다. 그러나 속간에 참여했던 이들은 창간 당시와는 다른 속간 때의 새로운 국면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국면은 크게 다르고 정세는 크게 다르다. 굳게 단결할 때요 힘차게 나아갈 때다. 이때는 행동할 때요, 발전할 때다. 삼천만이 결코 작은 수효가 아니로되 진실히 조국을 세울 사람이 신봉하는 진리가 과연 천주의 말씀이나 할진대 오늘날 조국이 양단되고 인류가 냉전 속에서 허덕이는 이때야말로 이를 선양하고 이를 실천하고 이를 증명할 때가 아니냐. 정신은 한가지로되 사명이 크고 중함을 통감함이 금할바 없다. 가톨릭 청년아, 분연히 일어나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속간 당시의 신문은 민족 해방의 새로운 국면에 서서 냉전체제와 민족 분단이란 상황을 직시하며 「조국성화」를 통해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속간사에서 제시된「조국성화」는 창간사에서 밝힌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속간사에 계속하여 등장하고 있는「소식보도」와「보조일치」는 결국「조국성화」를 위한 부수적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조국성화」를 오늘의 말도 바꾸어 본다면 그것은「민족 복음화」라는 단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신문의 창간사에서 제시했던 교회 발전의 구체적 형태가「민족복음화」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민족복음화」는 창간이래 가톨릭신문이 지향하던「교회발전」이라는 목표가 좀 더 승화되어 나타난 것이며, 또한 이것은 신문의 창간 정신에 깊게 뿌리박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가톨릭신문은「조국성화」즉「민족의 복음화」에 최대의 목적을 두고 창간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신문의 창간과 속간의 과정에서 신도들의 역할을 주목하게 된다.
물론 신문은 교회의 인준을 받아 발행된 것이지만 그 간행에 있어서는 신도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리고 이는 초기교회 이래로 한국교회사에서 계속하여 드러나고 있는 신도들의 자발성이 발현된 것이었다. 교회발전 내지는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투신한 선각적 신도들의 존재를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반종교 선전이 강화되어 가던 1920년대 후반기의 삭막한 사회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펴기 위해 신문을 창간했던 것이다. 그리고「새 나라에서 새 출발하는」재창간의 정신으로 속간호를 간행했다.
이와 같은 신문의 창간목적과 창설의 과정 등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가톨릭신문이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을 올바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신문의 변치 않을 목적이 민족의 복음화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바이다
미래를 위한 제언
교회신문의 목적과 기능에 대한 일반론적인 접근에 이어서 미래의 가톨릭신문을 위해 다시 몇 가지를 제안해보고자 한다. 이 제안의 전제로는 먼저 가톨릭신문의 간행목적인「민족의 복음화」를 주목해야 하며, 또한 현재와 미래교회의 요청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오늘의 교회와 신문은 민족의 문화전통과 민족적 삶의 현장을 주목하고 민족의 삶속에 자리잡아야 한다. 또한 현재와 미래의 교회는 양적인 성장에 못지않게 질적인 성숙을 추구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가톨릭신문은 민족의 복음화를 지향하며,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 신문이 발휘해야 할 민족적 기능으로는 민족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시켜 그 삶의 질을 높이고, 민족의 한을 치유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민족의 복음화 그 자체가 민족을 위한 가장 큰 봉시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민족적한의 원천이 되는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해서 교회신문은 기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민족의 화해를위해 교회와 교회신문이 메카시즘적 논리의 극복에 앞장서고 민족의 평화로운 재결합을 위한 노력을 전개해 나간다면 참다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구성원 모두는 넓은 가슴으로 교회를 이해하고 맞아들일 것이다.
가톨릭신문에 기대하는 두번째의 역할로는 사회적 기능을 들 수 있다. 신문은 사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확고히 밝혀주고 이의 실천을 촉진하는 계도적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관한 파수꾼의 역할을 교회 신문은 담당해야할 당위가 있지 아니한가. 사회복지와 사회 정의에 관한 지속적 관심을 통해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해주고 이에관한 교회의 정당한 관심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마다 교회의 정신을 심어줄때 민족의 복음화는 진정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알고 참답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신문이 발휘해야 할 세번째의 역할로는 한국가톨릭문화를 창조하는 기능이 있다. 복음의 토착하는 민족문화의 복음화를 가능케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톨릭신문은 한국문화의 전통, 특히 한국가톨릭 문화의 전통을 밝히고 선양하는데에 앞장을 서야 한다. 또한 오늘날 한국가톨릭문화의 요체가 되는 가톨릭적 학술과 예술의 발전을 신문이 주도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이를 후원하고 장려하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 분야에 관해 배전의 관심을 가져야한다.
가톨릭문화를 형성하고자하는 사업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성전을 건설하는 작업이다. 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성전의 건설작업에 충실하여야만이 눈에 보이는 성전의 화려함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신문에서는 교회의 학술적 업적들을 상찬하고 장려하며, 문학ㆍ음악ㆍ미술이나 공연예술에 이르니까 가톨릭 예술의 선양을 위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이땅의 가톨릭 문화는 더욱 꽃을피우고 신앙의 토착화와 민족의 복음화는 앞당겨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가톨릭신문에 거는 네번째의 기대로는 교회에 관한 정보의 질을 높여달라는 것이다. 교회정보 매체로서의 좀 더 세련된 기능을 기대한다는 말이다. 지난세대의 사관(史官)과 같은 입장에서 사건의 객관적 기술을 지향하는 보도 기사의 양을 늘리며 그 질도 높여가야한다. 또한 신도들의 교육을 위한 분석적 의견 기사들도 좀 더 다양하게 제시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면 신도들은 이 신문을 통해서도 자신의 삶을 신앙인의 삶으로 가꾸어 나가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톨릭신문은 오락성을 지향하는 기사에 대해서도 적절히 배려하고 전문가들의 많은 참여를 유도해서 기사의 다양성과 질적 수준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빛과 소금의 구실 다하길
가톨릭신문은 가톨릭청년의 자발적 노력에 의해서 창간되었고, 이제 60년의 연륜을 축적하게 되었다. 이 신문은 창간 이래 교회발전의 밑거름이 되고자 하였으며, 밑거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기톨릭신문은 무관의 제왕이라는 영예를 택하기보다는 복음선포를 위한 진실한 봉사자로서의 길을 걸어왔다고 하겠다. 또한 이 신문은「조국성화」, 즉 민족의 복음화를 지향하며 60년의 생애를 바쳐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신문이 걸어온 길은 결코 순탄치만은 아니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나름대로의 정성과 열의를 통해 민족의 복음화를 향해 꾸준히 전진해 왔다.
이에 6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가톨릭신문의 미래를 점검하기 위해 그 창간의 목적과 걸어온 길을 아주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제 가톨릭신문은 새로운 전환위기에 처해있다. 그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하나는 지나온 발자취에 스스로 만족하고, 과거에 대한 겸허한 성찰 없이 현실에 안주하고자하는 손쉬운 길이다. 다른 또 하나의 길은 과거보다 나은 미래를 전망하며 자신을 채찍질하여 새로운 도약을 꾀하려는 조금은 힘든 길이다. 그런데 이 신문이 자신의 창간목적에 충실하고자할 때에는 후자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미래의 가톨릭신문은 민족적 기능ㆍ사회적기능ㆍ한국가톨릭문화 창달의 기능 그리고 정보매체로서의 기능을 더욱 훌륭히 발휘해 줄 것을 기대해마지 않는다. 그리하여 옛등걸에서 향 꽃을 피우는 묵은 매화처럼 친근하고 의연한 자태를 언제나 드러내줄 것으로 생각한다. 가톨릭신문이 『소금과 빛의 구실을 하여, 땅에 맛을 주고, 세상에 빛을 주리라』(매스미디어에 관한 교령 제24항)고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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