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들어 한국천주교회는 새로운 도약기를 맞았다. 1981년 조선교구설정 1백 50주년, 84년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 등 역사적인 사건을 맞으면서 교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사회 속에 부각되었고 그만큼 사회로부터 또 다른 기대를 걸머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는 여러 가지면에서 혼돈을 거듭, 어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질만능주의ㆍ소비풍조ㆍ폭력과 불의 등의 현상은 인간소외ㆍ비인간화를 낳았고 우리앞에는 어두운 미래만이 전개되고 있다. 본보는 창간 60주년을 맞아 주교회의 의장이자 서울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과 대담을 마련, 교회가 담당해야할 몫과 한국교회 3세기의 진로를 모색하고자 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모든 면에서 혼란을 거듭, 미래는 불부명하기만 합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발전과 성장이 돋보이고 그 같은 증후는 이미 여러 결실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실은 정치ㆍ경제ㆍ사회 전반에 걸쳐 어둡게만 보여지고 있읍니다. 오늘 한국사회 전반을 짓누르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70년대들어 가난을 면해보자고 시작된 우리 경제발전은 자본과 기술이 없던 시대였으므로 노동집약적인 형태로 지속됐읍니다. 그러다보니 경제성장은 인간을 희생시킨 가운데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인간의 희생이 바탕이 된 경제성장은 물질만능ㆍ소비주의를 만연시켰고 사회 곳곳에선 비인간화 현상이 초래됐읍니다.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과드라제시모 안노」에서 『상품은 공장에 들어가 값진 물건이 되어 나오지만 인간은 공장에 들어가면 폐품이 되어 나온다』고 지적된대로 인간은 상품을 만드는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읍니다. 이러한 경제발전 형태는 인간을 위하고 인간이 중심이 된 정책이나 사회개발을 전무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모든 정책, 심지어 도시개발조차 자연스럽게 인간을 희생시키는 바탕위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요. 근본적인 가치관 전체가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로서 인간으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는「선진국」, 개인적으로는「일류」가 되기만을 추구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속은 텅비었으나 겉만이라도 그럴듯하게 포장, 남으로부터 다른 나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이것이 우리사회 전체가 앓고있는 병, 콤플렉스입니다. 우리 현실문제들은 정치든 경제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읍니다.
-추기경께서도 잠간 지적하셨지만 오늘 우리의 현실 문제 가운데 도시빈민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읍니다. 그동안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상당히 깊숙한 차원에서 도시빈민 문제에 접근해왔고 또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유엔이 제정한 「무주택자의 해」를 맞아 도시빈민 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책은 무엇이며 정책적 차원에서 근본적인 해결점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지난해 한강 종합개발이 완공된 그즈음, 아마 아시안 게임 직전으로 기억되는데요. 마침 그 길을 지나가다가 길가에 장식용으로 전시한 화분들을 보게 됐는데 그 옆에 푸른빛의 장식물도 눈에 띄었읍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푸른빛의 장식물은 나무가 잔디가 아니라 푸른 물감을 뿌려놓은 눈요기 장식물이었읍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읍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되고 있는 전시욕ㆍ과시욕의 한 단면인 것입니다. 아시안 게임이 열리는 3주정도만 어두운 면을 안보이면 된다는 것, 그것이 현재 정책 입안자들의 의식이라는 얘기지요.
그동안 수없이 반복돼 온 철거민 문제만 하더라도 무조건 가리고 싶은 과시 행정의 소산이 아닐 수 없읍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억지로 가리려하고 이 과정에서 정말 갈 곳 없는 이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시(市)가 정말 시민ㆍ국민을 위한 행정을 하고자 한다면 소시민을 울리는 겉치레 개발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집 없는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주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도시빈민ㆍ무주택자 문제에 있어 교회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몫은 삶으로써 돕는 것입니다.
현재 신림동을 비롯 여러 곳에서 우리 신부님들이 그곳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살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구체적 삶의 나눔을 실천하고 있읍니다. 신부님들이 주민들의 목자로 또 친구로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맡아야할 몫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곤 합니다. 이밖에 철거민들을 위해 서울의 경우「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물론 이 모임이 문제해결의 주체가 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있읍니다.
-추기경께서는 최근 강론ㆍ발표문 등을 통해 정치ㆍ사회ㆍ경제 제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우리사회의 현실 문제에 대한 책임이 정치ㆍ경제인과 지식인ㆍ종교인 그리고 국민 전체에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신바 있읍니다. 길고도 어두운 터한 현실에서 과연 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시민적 公憤 느껴야
▲우선 모든 국민들이 개인주의에서 탈피해야합니다. 어찌보면 오늘의 현실은 무관심과 함께 공동체의식의 부족에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 탄압에 대해 시민적인 공분을 느끼는 등 민족 공동체 의식 속에 인간을 존중할 줄 아는 가치관을 길러야합니다. 옛날, 나치독일에서 유태인들을 잡아갈 때 개신교 목사들이 우린 유태인이 아니니까 나설 필요 없다면서 침묵했읍니다. 나중에 목사들이 끌려갈 때 신부들이 우린목사가 아니라면서 방관했고 그 후 신부들이 잡혀갈 때 아무도 개입을 하지 않았던 사실이 있읍니다. 우리도 지금 그때와 마찬가지로 방관자로 있읍니다. 정치인들은 바로 그 같은 국민들의 심리적인 약점을 이용하고 있구요. 이같은 국민의식이 타파되지 않는 한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읍니다.
법률을 고친다고 민주화되는 것이 아니지요. 지난번 박군 고문치사 사건 때 변호사들과 관계 법률을 검토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지금의 법률로도 고문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읍니다. 고문 없애기 위해 법률을 뜯어 고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고문하던 사람들이 고문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이며 국민들은 절대 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되어야 하고 그에 앞서 국민의식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물리적인 힘이 아니더라도 서명이나 편지 등을 통해 조용히 의지를 보여주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은 먼저 언론인ㆍ성직자ㆍ교수 등 지식인들이 앞장설 때 열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위해 어쩌면 우린 좀 더 고난을 겪어야하며 그 고난을 통해 이래서 안된다고 깨닫는 사람이 많이 생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만일 기성세대가 이쯤된다면 소여하는 학생들에게 모든 것은 우리가 맡을테니 너희는 공부나하라고 얘기할 수 있을겁니다. 현재로서는 말리고 싶어도 설득력이 전혀 없읍니다. 여전히 학생들만 희생당할 것을 지켜보면서 가슴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같은 상황 속에서 살고있는 교회가 어두움을 헤치고 희망의 미래를 제시할 방법은 없는지요.
현재 사회 일각에서는 시국문제와 관련, 교회가 참다운 삶의 모습을 살지 못했고 또 제시하지 못했다는 지적과 함께 큰 기대도 걸고있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만.
▲많은 이들이 종교가 개인의 구원을 위주로 하는가 아니면 공동체적인 구원이 목표인가 하는 물음을 갖고 있읍니다. 교회 헌장에서도 나타나있듯이 하느님은 개개인을 받아들이시지만 그 개개인을 상호간에 아무런 유대없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백성으로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그중에서도 소외된 죄인들, 당신을 배척한 사람들에 대해 특별한 사랑을 보여 주셨읍니다. 그것은 그분의 나라에서는 가난하다고 멸시받거나 억눌림이 없으며 모두 같은 하느님의 아들ㆍ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는 장벽을 무너뜨리기위해 힘써야 합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적어도 가진 사람들이 못 가진 사람들을 마음속에서부터 같은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교회가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는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일치의 성사로서의 구실을 다했는가, 또 소외된 이들을 위해 얼마나 사랑을 실천했는가에 대해 진정한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성체와 교회의 해에 우리교회가 살아야할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교회는 81년에 교구설정 150주년을, 84년에는 선교 200주년을 지냈고 그리고 이제 89년 세계 성체 대회를 준비하고 있읍니다. 그 사이 한국교회가 눈부시게 성장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신자가 늘어나고 특별한 선교 사목 대책없이도 복음화가 잘되고 있으니 흔히들 호황기를 맞았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과연 교회가 이같은 성장을 제대로 수렴하고 있읍니까. 내실이 부족하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읍니다만.
▲솔직이 말해 그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세에 밀려서 성장해왔다고 볼 수 있읍니다. 그러다보니 반성의 시간도 없었고… 일선 본당 신부님들의 얘기 들어보면 신자들이 계속 늘어 대부분 혼자 6천명이상의 신자를 감당해야 하므로 신자 개개인을 상대하지 못하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목위원ㆍ구역 반장 등 평신도들의 활동으로 다소 커버는 되지만 양적팽창을 감당하지는 못하고 있읍니다. 성당이 비좁아 분가하려 해도 터를 잡을 수 없어 성당을 헐고 다시 크게 짓고 새로 짓는 성당도 신자가 늘어날 것에 대비, 또 크게 짓다보니 자연히 교회는 대형화될 수 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대형화 현상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물론 비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이 있다보면 반성을 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당연히 해결점을 찾지 않겠읍니까. 교회 언론들이 이런 문제점을 지적, 비판해야 하지요. 교회마저 언론자유가 없으면 안되니까(웃음). 그러나 그 비판이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가운데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대안점을 함께 연구, 마련할 수 있는 발전적인 내용이어야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어떤이들은 한국교회의 호황이 10년 또는 20년을 가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 한국과 한국교회가 구미 각국이 1백년에 걸쳐 누린 발전, 변화의 속도를 너무빠르게 접하고 수용하기 때문에 쇠퇴 또한 그만큼 빠를 것이라는 견해에서 나온 진단인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보시는지요.
호황(?)의 한국교회
▲그것은 쉽게 진단할 수도 없고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봅니다. 70년대 초 대신학교를 새로 지을무렵, 지금은 신학생이 많지만 나중에 적어질 수도 있으니 아예 교구별, 학년별로 짓든지 하자고 우리 나름대로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건립은 로마의 원조를 받아 짓는 입장이어서 로마에 우리의 계획을 전했읍니다만 거절을 당했지요. 그래서 지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 학교가 부족해 곧 학교건물을 늘렸고 지금은 수원을 갈라주고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현재는 또다시 이 다음을 대비해 신학교를 사야한다고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읍니다. 당시의 우려는 빗나간 셈이지요. 그러므로 앞으로 10년 후 신자나 성소가 줄어들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겁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는 가끔 혹시 하느님께서 다른 뜻이 있어서 우리 민족을 그리스도화 해가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문제를 비롯 분단 상황 등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신자가 몰리는 현상 때문이지요.
-지난 3월 10일로 우리교회는 교계제도 설정 25주년을 맞았읍니다. 이에 맞춰 주교단에서는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또 담화문도 발표하셨는데요. 교계제도설정 25주년이 우리 한국교회에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도움을 받던 의존적 교회에서 자립교회로 성장하는 계기가 돼야 하겠고 나아가 남을 돕는 교회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교계제도 설정이후 지난 25년 동안 성숙된 교회로 성장했다고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성장이나 발전에 만족해서는 안되며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쇄신과 신앙공동체 내면의 질적 성장을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우리교회는 로마로부터 교구마다 조금씩 원조를 받고 있는데 물론 전에 비하면 1백분지 1로 줄어든 상황이지만 현재 그나마 안받도록 결단을 내릴 준비는 되어있읍니다.
-방금 남을 돕는 교회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현재 서울교구의 경우 신자들의 자연증가와 더불어 물적 자원도 집중되고 있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따라서 지방교구와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합니다만 현재의 나눔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현재 서울은 교구예산의 10분의 1을 타교구와 나누도록 하고 있는데 지난해에는 3억을 지원했읍니다. 아마 본당차원에서의 나눔을 합한다면 훨씬 큰 액수가 되겠지요. 서울교구의 경우 만일 교구 예산이 30억이라면 3억, 40억이 된다면 40억 등 11조를 설정해 놓고 있으며 본당차원에서도 11조를 이웃을 위해 사용토록 권고하고 있읍니다. 아직 완벽하게 시행되지는 않고 있지만 점차 크게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타교구 지원율을 약20%정도로 늘리고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나눔에 있어 조심해야할 것은 우리교구 본당이 이만큼 주었다고 하는 자긍심ㆍ자만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서울교회가 시골교회와 모든 면에서 함께한다는, 즉 정신적인 일치와 나눔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서울의 몇몇 본당과 시골본당이 자매 결연을 맺고 함께 피정교육을 하고 공동사목지표를 세우는 모습은 참으로 반가운 현상이라 하겠읍니다.
-89년이면 우리교회는 처음으로 세계 성체대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세계 성체대회는 과연 어떤 성격의 행사인지요. 신자들은 성체대회의 성격과 준비과정을 궁금해하고 있읍니다.
▲세계 성체대회는 세계 모든 교회가 정신적인 합일 속에서 함께하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입니다.
성체없이 교회가 형성될 수 없고 교회행위가 완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세계 성찬전례를 이 땅에서 한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잆읍니다. 성체대회의 주례자는 교황성하이며 만일 교황님이 참석하실 수 없으면 대리자라도 보내야 하는것이 정석입니다. 교황성하를 모시고온 교회가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하나로 모이고 서로 나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온 인류에 미치게 한다는 것이 세계 성체대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지금부터 그 준비의 일환으로 성체성사의 의미, 성체성사안에서의 예수님 사랑, 또한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깊이 묵상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건설적 비판 필요
-추기경께서도 아시다시피 가톨릭신문이 4월 1일로 창간 60주년을 맞았읍니다. 60년이라는 세월은 교회언론을 떠나 일반언론의 역사로 볼 때 결코 짧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언론의 한 파트로서, 교회의 대변지로서 사명 의식 속에 많은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여러 가지 여건상 제대로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여러 가지 여건상 제대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큽니다. 60주년을 계기로 가톨릭신문을 포함, 교회 언론들이 교회 쇄신과 복음화를 위해 어떠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고 진단하십니까.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재임 하셨던 경험에 비추어 조언해 주십시오.
▲우선 가톨릭신문 창간 6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가톨릭신문은 일반 신문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여러가지 여건이 어려운 입장임을 잘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가톨릭신문은 모든이를 위한 신문이라는 점에서 만사를 지혜롭게 대처해야할 것이라고 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것을 늘 묵상하면서 다시 말해 복음의 그리스도를 닮는 가운데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하며 사회정의 문제도 그런 각도에서 보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적 내용을 이 시대에 맞게 해설한 공의회 문헌 및 여러 교회 문헌 등을 신자들에게 알림으로써 의식 개발에 앞장서도록 권고하고 싶습니다. 내가 재임할 당시는 64년ㆍ65년이었으므로 공의회가 한창무르익는 시기였읍니다. 그 덕으로 공의회 문헌을 많이 번역했고 공의회를 쉽게 접하고 알게 됐지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보람있는 시간이었읍니다. 최근 교회에 대한 비판 문제로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때도 그같은 문제는 있었읍니다. 당시 교파들에게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을 마음껏 하도록 통로를 열어놓고 그들이 기고한 내용을 빠짐없이 실어준 적이 있었읍니다. 그때도 교회 안에서 논란이 분분했고 故장면 박사는 내게 편지를 보내 걱정의 말씀을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중요한 것은 비판자체가 객관성이 있는 비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신 공격적인 비판이나 단편적인 비판은 일반 언론도 마찬가지겠지만 교회 언론은 더우기 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비판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오랜시간동안 좋은 말씀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