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세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성사여야 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 일시적인 위안을 가져다주는 사회적인 시종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그분의 왕국을 약속해 주신 자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만일 교회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고,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가난한 자들의 것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즘에는 중류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그 수는 계속 증가 추세다. 이들은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괴로움을 예민하게 자각하고는 있다. 하지만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과 불안정 상태에 참여할 수 있는 건설적인 대안은 거의 혹은 전혀 없다고 느낀다. 여기서 그들이 보이는 저 자각은 그 자체로 걱정의 원천이다. 그러나 바로 그 고뇌에 하느님이 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분의 가난한 자들이 겪는 고통에 가 닿게 해주시는 길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가난한 이들, 고통당하는 이들과의 친교, 일치의식에 젖어들 때 그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혁된다.
이들은 언로가 없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일수 있는 예기치 못한 많은 방법들을 찾아내게 될 것으로서, 비동조적인 자로 드러나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위태롭고 좋게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상황에서도 역시 진리를 말하게 된다.
다양한 형태로 정의와 평화를 위한 작업을 떠맡을 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형태가 보로 이런 것이다. 예수에 대한 그리고 가난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을 향한 그분의 투신에 대한 충실성은 교회의 삶의 제반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가난을 포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어떤 친구를 얻고 어떤 친구를 잃을지, 어떤 안전형태를 얻고 잃을지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하거나 하지 않을 일의 종류에 대한 조건을 걸 때 그 조건에 대해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고난 받은 종이요, 나자렛의 가난한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을 듣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우리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개인으로서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가 당신의 세계에 관여하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의 세계에 관여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저주 있으라 부자들에게는」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오직 그렇게 관여할 때만이 그분이 약속하신 왕국의 상속자이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 당신 겨레의 옛 빠스카 식사 형태를 취하셨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처지로부터의 해방과 계약을 통하여 그들이 특별한 하느님 백성으로 택해질 상징하는 식사였는데, 예수께서는 이 식사를 일변시키신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새로운 관계를 상징하게끔 된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생명-그분 자신의 살과 피-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계약이 세워졌다. 이때 바쳐진 제물은 어떤 한 종속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과월절 식사의 테두리 안에서 빵과 포도주라는 옛 상징을 취하여 그것을 당신자신, 그분이 삶과 죽음 부활하고 동일시하셨다. 제자들과 같이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가운데 그분은 자신을 나누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식사에 참여한 이들을 당신자신의 삶에 일체화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를 되살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 자신의 삶속에서 그분의 이야기를 재연할 수 있도록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통하여 당신이 주기 위해서, 백성을 당신 자신과, 그리고 서로들이 일치ㆍ결합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계시하셨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만찬 때 그분 자신의 삶과 위력에 대한 신앙에 토대를 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이 공동체는 백성들이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남성이나 여성, 혹은 자유인이나 종 등으로 구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 계급 구분이 철폐되고 모든 장벽들은 무너져 내린 그런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찬을 통하여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하신 당신의 말씀을 채우는 것으로서 성찬을 거행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이 건네져서 효과를 발할 수 있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가 이런 것을 먹고 마시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찬 식사를 함께 나누는 이들 역시 자신과 하나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실상 성찬에서 기념(억)되는 사건은 단지 마지막 만찬만은 아니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그 식사는 예수께서 당신생애동안 드셨던 의미 깊은 모든 식사, 특히 복음에서 기억되는 그 모든 것들-그러기니까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그리고 그분의 친구들은 물론 그분이 사셨던 당시 사회에서 여벌로 여겨졌던 백성,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신 식사까지도 모두-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배고픈 이들 모두들 먹이는 것을 생각나게 하고, 먼저 초대되었던 이들이 오기를 거절하여 골목길에서 다른 사람들이 데려와졌던 혼인잔치를 생각나게 한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부활한 뒤에 제자 드로가 같이 드셨던 식사의 예표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식사들에 있어서의 구체성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육학적 성격을 떠올려주는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저세상의 삶에 한해서 관련을 짓는다거나 여기 지금의 삶과는 결렬된 것으로 보는 그런식의 성찬의 영성화를 괴하지 않도록 막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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