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활동
이미 설명한바와 같이 통일교는 창립직후부터 해외선교에 주력하였다.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통일교의 해외선교활동은 가는 곳마다 기성그리스도교와 마찰을 일으킴으로써 심한 반발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성과를 얻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특히 60년대에 세계적으로 물결쳤던 반 (反)문화운동 (counterculture)은 통일교가 해외에서 자신의 터전을 잡는데 유리한 요소가 되었다. 기성종교에 염증을 느낀 서구의 젊은이들은 동양적 색채가 강한 통일교회 교리에 매혹하기도 하였으며, 극도의 개인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던 일부 젊은이들은 철저한 훈련을 통해 강한 소속의식을 부여하는 통일교의 조직체계가 잃어버린 준거집단(準據集團)을 되찾게 해주는 새 공동체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통일교는 이러한 젊은이들의 신종교운동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 힘입어 통일교는 각종의 사업 등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문선명 교주는 65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세계 순회활동을 전개하면서 해외선교를 독려하였으며, 73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해외선교활동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통일교에서는 해외선교활동을 지원하기위해「국제 부흥단」을 창설하여 각국에 대한 순회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교의 선교활동은 70년대 중반부터 상당한 벽에 부딪치기 시작 하였다. 반문화운동의 퇴조와 보수주의의 재등장, 급속히 성장하는 통일교에 대한 미국 정계와 재계의 경계, 통일교가 관련된 소위「코리아게이트사건」의 발생, 기성 그리스도교의 반발 등은 통일교의 급속한 전파를 저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문선명교주의 탈세위반혐의에 따른 미국 뉴욕검찰청의 기소와 유죄판결, 그리고「덴버리」교도소에서의 복역 등으로 인해 통일교의 해외선교활동은 극도의 어려움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통일교는 중남미지역에 대한 선교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중남미국가들은 가톨릭신자들이 전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성직자의 부족 등으로 인해 신자들의 종교적 열성은 과거에 비해 크게 낮아있었다. 따라서 미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통일교로서는 중남미국가들이 최상의 선교지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지역에서의 선교활동도 기대만큼의 성과는 얻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역은 비록 성직자의 부족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신앙의 기초는 아직도 견고하였으며, 더욱이 집권계급의 지원을 받으면서 극우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우는 통일교의 선교방법은 오랜 기간 동안 군사독재정권에 시달리면서 엄청난 빈부격차에 허덕이는 중남미의 국민들에게 그렇게 호의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85년「덴버리」교도소를 출옥한 문 교주는 선교활동의 목표를 한국으로 되돌리기 시작하였다. 그해 12월에 귀국한 문 교주는 몇 차례의 단기출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국내에서 보내면서 한국선교에 박차를 기하기 시작하였다.
실상 75년도에도 통일교에서는「등잔 밑이 어둡다」는 기치아래 국내에서 전국적인「희망의 날」대행사를 개최하면서 국내선교의 강화를 시도한바 있었다. 그러나 통일교는 이단이며, 문 교주는 말세에 나타날 것으로 성서에 기록된「거짓 그리스도」(마태오 24ㆍ5, 마르꼬 13, 6) 또는「음녀」(요한묵시록17장, 공동번역에서는「탕녀」로 되어있음)라고 선전하는 기성교회의 반발 때문에 별 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었다.
이제 통일교는 다시 한국선교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 5월 1일 창립 34주년을 맞은 통일교에서는 전국교역자의 80%를 대이동 시키는 한편, 전국 1천 3백여의 면단위를 대상으로 대규모선교계획을 수립하여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통일교에서는 이미 전국의 군 단위 교역장들에게 모든 면소재지에 교회 겸 다목적용의 건물을 매입, 건립하라는 지시문을 하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지시문에는 건평 4백평 내외의 3층 건물을 소재지의 상권지역 내에 확보하여 맨 위층은 교회로, 가운데층은 세미나와 승공교육장 및 예식장등의 집회용으로 그리고 맨 아래층은 연쇄점등의 상업용으로 활용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계획은 하나의 건물에 세 가지 이상의 용도를 가능케 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면서 교세를 확장하고 통일교와 관련된 여러 활동들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업에 필요한 예산은 한 교회 당 평균 2억원으로, 전국적으로는 3천억원 정도에 이르는데, 그 모두는 본부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일교는 이러한 계획에 따라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충청북도에서는 읍ㆍ면마다 6백 60~1천 6백50㎡의 대지에 연건평 3백30~9백90㎡ 규모의 3층 교회를 금년 말까지 건립한다는 계획아래, 현재괴산군 칠성ㆍ청산면, 음성군 원남ㆍ생주면, 단양군 적성면 등 일부지역의 대지를 매입, 완료하였다.
통일교에서는 66년「초교파기독교협회」를 설립하여 기성교단과의 대화를 모색하는 한편, 금년에는 교단간부인 이재석목사가「한국종교인협의회」의 회장직을 맡아 타종교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각 대학에는「원리연구회」를 조직하여 정식학생서클로 등록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이 단체는 86년말 현재 86개에 이르고 있다. 최근「원리연구회」는 대학 내의 또 다른 통일교 학생서클들인「남북통일전국학생총연합」(통학련으로 불리움)과「국제기독학생회」와의연계를 통해 대학 내에서의 선교활동을 강화하고 있으며, 소위 운동권학생들과 이념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최근 통학련에서는 각 일간신문에「통일논의에 관한 대학생 공개토론회를 제의 한다」는 광고를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들로 인해 대학가에서는 통일교산하의 서클들과 기성교회의 학생회간의 충돌, 그리고 운동권학생들과의 대립과 충돌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통일교는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그에 따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탈자들도 발생하고 있다. 그중에는 교단간부로 재직하다가 탈퇴하여 통일교의 내막을 폭로하거나, 「국제통일교대책문제연구소」와 같은 기관을 설립하여 반(反)통일교운동을 전개하는 자들마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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