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前 主幹 회고 - 박도식 신부 (대구 신암동본당 주임)
언제나 관심갖고 지켜볼터
서울ㆍ부산오가며 신문홍보
주교단 비판 社說싣고 혼줄나기도
1964년 해군 군종생활을 마치고 예편이 되어 대구로 왔다. 임시로 동촌본당 주임 신부가 되어 나의 인사발령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때의 가톨릭시보 사장님이었던 김수환 신부님(現 추기경, 그때는 사제였었다)께로부터 가톨릭시보사의 일을 같이 하자는 종용을 받으면서 서정길 대주교님으로부터 65년에「시보사」에 임명을 받고 김수환 사장 신부님으로부터 서울분실장의 보직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주일이 되면 서울 각 본당에 다니면서 신문 독자 확보를 위한 홍보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약 일년간 서울분실에서 열심히 일하던 차에 김수환 신부님은 마산교구장으로 피임되시어 대구를 떠나셨다. 그러자 대구교구청에서는 나를 불러 대구에 와서「시보」를 맡으라는 것이다. 전격적으로 가톨릭시보 주간으로 발령을 받았다.
대구에서도 주일이면 한주일은 서울로, 한 주일은 부산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신문 확장 운동을 계속했다. 서울분실장을 겸해서 본사 주간으로 있었기 때문에 편집 때는 본사에 있었고 편집이 끝나면 주로 서울 사무실에 있었다. 그러자 1966년 5월 25일자로 시보사 주간에서「사장」발령을 받았다. 그래서 시보 1966년 6월 5일자부터 사장이란 이름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김수환 사장님의 후임이 된 것이다. 매일 동분서주해서 그 당시 발행부수 2만 2천부를 올린 기억이 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공부에서 전국 주간신문 사장 모임이 있었다. 그때 문공부 담당자는 가톨릭시보는 발행인이 따로있고 왜 사장이 또 따로 있느냐고 물었다. 교회기관지로 매일신문의 자매지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그때 가톨릭시보 발행편집 인쇄인은 김영호 신부님 이름으로 되어있었고 그 밑에「사장 박도식」이렇게 되어있었다. 문공부에서 발행인 김영호 신부님 앞으로 정식 공문이 내려왔다. 발행인과 사장과의 애매한 관계 해명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때 김영호 신부는 나를 불러서 그 공문내용을 설명했다.
나는 내 혼자서 해결할 수 없고 주교관으로 가서 매일신문과 가톨릭신문의 행정적인 정확한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그때부터 매일신문과 시보사와의 덤덤한 관계가 시작이 되었다. 김영호 신부의 주장대로 나는 사장에서「편집인」이란 타이틀로 강등이 되었다. 그리고는 시보사를 떠나 계산동 보좌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후임에 신상조 신부님이 오셨고 그때부터 가톨릭시보 담당신부는「편집인 주간」으로 불리고「사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재직 중 잊을 수 없었던 것 중 또 하나는 주교회의를 앞두고 사설에 약간 한국주교단을 비판한 내용을 쓰고 노 대주교님으로부터 혼이 난 사건과「가톨릭시보」제호가 좋지 않다해서「가톨릭신문」으로 그 제호를 고치려고 무척 노력하다 그것을 이루지 못한 일이다.
이제는 떳떳하게「가톨릭신문」이 되었고 벌써 60주년이란 역사를 빛내고 있음을 볼 때 실로 감개무량하다. 나는 신문사를 떠났지만 가톨릭신문이 나에게 중요한 관심사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다. 계속 가톨릭신문의 발전을 옆에서 눈여겨 볼 것이다.
■ 前 編輯局長 회고 - 윤광선 (영남교회사연구소 소장)
“6ㆍ25때 사무실 등 징발당해 3년 반 동안 내 집에서 작업”
편집하며 수금ㆍ배달 등 업무겸임
「가톨릭신문」은 그 전신이「천주교회보」로 그동안 제호를 바꾼 일도 세 번 있었다.
8ㆍ15 민족 해방과 더불어 회생한 대구의 가톨릭 청년운동은 소식보도, 보조일치, 조국성화의 슬로건으로 16년 전에 폐간된 월간「천주교회보」를 1949년 4월 1일 복간하였다. 그러나 1년 2개월 후인 1950년 6월 25일 공산군의 남침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3년 이상 계속되는 동안 특히 전선사령부가 있는 대구는 학교와 교회의 부속건물이 모두 군용으로 징발되고, 거리는 피난민과 판자집으로 붐비던 때였으므로 천주교회보사도 사무실과 집기까지 군용으로 내어주고 난 뒤 나의 삼간 오두막집이 3년 반동안 사무소 구실을 할 때이다. 也人(김익진) 선생과 日旨(김용태)형은 편집동인으로 필자와 고락을 함께하기 시작하였는데 야인선생은 김천 성의중 교감이다가 6ㆍ25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고 일지현은 고향(덕원)에 가기위해 국군의 북진때 종군 기자가 되었다가 1ㆍ4후퇴로 다시 대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야인선생은 필자보다 9세 연상이지만 허례와 가식을 싫어하는 소탈한 성격이며 아이와 같이 천진한「휴머니스트」였다.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는 한편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넓은 중원천지를 무대로 젊음의 정열을 쏟기도 했던 야인은 『나는 지식의 쓰레기통』이라 했듯이 여러 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로 일가언을 할 수 있는 많이 읽은 여러 책들 가운데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전기가 있었던 것이 매개가 되어 가톨릭시즘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사상적 순례 끝에 가톨릭에로 귀의하게 된 분이다.
필자보다 한살위인 일지형은「재동경 조선 가톨릭 학생회」회원시절 사귄 친구로 일에 있어 박력있는 추진자며 정력적인 사나이다. 왜관 순심 중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첫교감이 되었고 대건중고의 교감이었고 대건중고재직시에도「성허(聖墟)」를 필명으로 기고했던 연분이 있다. 외신과 세계 교회 소식재료를 얻기 위해 미군 종군 사제 사무실을 드나들 때에는 야인 선생과 동행했으며 미국 교회신문과 잡지 등 얻어온 자료를 야인 선생댁에서 취사선택하여 취재메모를 갖고 필자의 집에서 기사를 썼던 것이다. 편집뿐 아니라 모든 업무를 혼자 맡았던 때라 어떤 때는 기사취재와 지대수금과 배달을 겸하여 대한민국 임시 수도 부산에 출장가야 했는데 이때 야인선생 또는 일지형이 동행을 했다. 피난민의 물결에 휩쓸려 온통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듯했던 50만시민의 항도부산을 찾아가는 그 시절의 출장이란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고생이었다. 사무실 하나도, 책상 하나도 없는 적빈이었지만 서울에서 발행하던 「경향잡지」「가톨릭청년」의 간행이 중단되어「천주교회보」가 한국 가톨릭의 유일한 정기 간행물로서의 사명 때문에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희생과 고초를 기쁘게 감수하면서 간행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홀어머니가 자녀의 결혼식 때 눈물흘리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가톨릭신문 60주년에 두고인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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