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신문사의 초창기 시대를 얘기듣고 싶어서 왔읍니다.
▲사실 그당시 우리 편집위원들은 열성 하나가 재산의 전부였어. 신문 편집은 물론, 취재ㆍ원고청탁, 그리고 논설까지 쓰면서, 늘 원고뭉치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어.
-그 당시 선생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셨읍니까.
▲내 나이 16살에 가톨릭신문 전신인「천주교회보」를 창간했지. 처음 시작할 때는 남방천주교 청년회 기관지로 4ㆍ6배판으로 월보로 나왔어. 나하고 최정복ㆍ윤창두ㆍ최재복ㆍ서정섭 씨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가해 신문을 만들었지.
-창간 동기랄까,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창간 동기는 그 시대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시대가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닫고 지냈어. 그래서 계몽적인 입장에서, 한국교회를 더 살찌우기 위해서 시작했지. 왜 사시에도 나타나 있지만 소식보도 의견교환ㆍ보조일치 등에 중점을 두고 신문을 찍었어.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려운 점이 어디 한 두가지 였어야지.
우선 물질적으로 부족해서 돈을 구하러 다니느라 진땀을 뺏어. 때로는 돈이 없어서 신문발행이 늦어지기도 했지. 그리고 지면을 메우는 일도 여간한 일이 아니었어. 가편집을 해서 원고를 청탁해 놓으면 어디 원고가 들어와야지. 어떤때는 우리 편집위원들이 시간을 쪼개 직접 청탁분의 원고를 밤을 새워 쓰기도 했지.
-대단한 열성이었읍니다. 그런데 주위의 반응은 어땠읍니까?
▲대단했지. 신문을 만든다는 일이 무척 피곤했지만 여기저기서 오는 격려 때문에 견딜만 했어. 전국 방방 곡곡에서「천주교회보」보급소를 운영해 보겠다고 연락이 왔어. 심지어는 만주에서도 연락이 와서 지사를 열기도 했지. 그리고 우리 어려운 살림을 헤아려서인지 멀리 하와이서도 찬조금을 보내주기도 했어.
-그야말로 우리 신자들이 아니면 못할 일이었읍니다. 그런데 그 당시도 편집회의를 했읍니까.
▲물론했지. 지금의 계산동성당 가까이에 있는「복사사랑」이라는, 우리들 남방청년회 회원들이 모이는 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집회의를 가졌어. 일주일에 한번 밖에 편집회의를 할 시간이 없어서 만나면 무척 바빴고 밤늦게까지 편집을 해서 원고를 청탁하고 그 달에 실릴 모든 원고를 계획하고 점검했어. 이렇게 밤늦게까지 편집회의를 하다보면 배가 고파져서 돈을 갹출해서 막걸리를 사서 밤참으로 먹기도 했지.
-16살 때 말입니까.
▲어허 그때 16살이면 어른이었어(웃음). 대부분 가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최정복氏는 나보다 10여년이나 연상이었는데 그분이 정말 애를 많이 썼어. 처음에는 신문인쇄를 대구에서하다가, 얼마안가서 서울의 근택인쇄부에서 했는데 그러다가보니 한달에 몇번씩 서울을 들락거렸어 (오래도록 말이 없다가 눈물이 고인다). 이젠 고인이되어 이세상에 없지만 교회를 위해 아주 헌신적인 분이었어.
-기사는 주로 어떤 것을 다루었읍니까.
▲교회에 관한 것이라면 안 다루는 것이 없었어. 특히 그 당시 한국교회 신자들이 대부분이 교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계도적인 입장에 서려고 하다가 보니, 교회 전례에 따라서 논단 등을 실어서 그들을 깨우쳤지.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다면…
▲많은 것들이 아직 머리에 남아있는데, 특히 김구정씨가 소설형식으로 연재했던「연옥순례기」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지. 원래 김구정씨가 입담이 좋고 활달한 성격이라서 그런지「연옥순례기」에서 도활달 한 문장으로 여러가지 상상들이 아주 기발하고 재치있었어. 그래서 독자들의 반응도 대단했지.
-외람된 말씀인지 모르겠읍니다만 바쁜 시간을 쪼개어서 신문을 내다가보니 큰 실수는 없었는지요.
▲실수라기 보다 내 개인적인 일인데, 한번은 내가 동경서 강의를 했는데 그 내용에 조금 문제가 있어서 나중에 돌아와서 다른 편집위원들에게 혼줄이 난적이 있었어. 내가 강연하면서「한국에서는 분도 성인의 패를 벽에 붙여놓으면 도둑이 안들어온다」고 얘기했는데 이게 말썽이 되어서 모두가 나를 꾸짖는데 정말 혼이 났어.
-좀전에 청탁원고 수거가 안돼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셨는데, 그런일이 자주 있었읍니까.
▲자주 있었어. 그 당시 교회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원고를 청탁할 사람이 빤해서 자주하다가보면 약속을 못 지키는 경우가 많았지. 이것은 여담인데 한번은 청탁한 원고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서 내가 그 청탁분의 원고를 모두 써서 신문에 싣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어.
-신문을 전국에 배포하고 수금하는 일은 어떻게 했읍니까.
▲좀 전에 잠시 얘기했지만 전국 방방 곳곳에서 보급소를 해보겠다고 해서, 여기저기 지사를 두었는데 거의 대부분 우리들이 한번도 가보지도 않고, 신자라는것 하나만 믿고 신문을 보냈는데 신통하게도 날짜를 잘 맞추어서 돈을 우송해줘서 운영에 도움이 됐지.
-신문사가 주최하는 행사는 없었읍니까.
▲왜없어. 아주 많았지. 그 당시는 신문사 주최라기보다는 청년회 주최로 했는데, 체육대회도 열고 연극공연도 하고 음악회도 가졌지. 아마 그 당시로는 정말 획기적인 활동을 많이 했지.
한번은 일본 동경대학생들을 초청해서 친선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지. 정말 그때는 우리교회가 일반시민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깨우쳐줬어.
-오랜 시간 고마왔읍니다. 창간위원으로서 앞으로 저희 신문이 어떻게 나가야 할지 한 말씀 해주십시오.
▲처음 우리가 시작할 때에 비하면 정말 비교가 안되게 발전했어. 이젠 어디다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로 봐서는 신자 3백만 돌파라는 큰 목표를 두고 있는 마당이니, 여러 가지가 모두 중요한 거겠지만 전교에 앞장서는 신문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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