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의 전신인「천주교회보」창간당시인 1927년도의 한국교회는 서울ㆍ대구ㆍ원산ㆍ평양 등 교구가 4개에 불과했으며 신자총수는 10만명을 겨우 넘는 10만 4천 6백 6명이었다. 교회창설 1백 43년만에 신자 수 10만이라는 초라한 교세였다. 게다가 일제 식민지치하여서 교회의 활동은 심한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한「가톨릭신문」의 전신「천주교회보」의 모습 역시 빈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 빈약한 모습은 당시 교세와 현재의 교세차이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본보는 창간 6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14일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실에서 있은 성직자(최석우 신부) 수도자(김순자 수녀) 평신도(유현석 변호사)의 정담(鼎談)을 통해「가톨릭신문을 통해 본 한국천주교회의 어제ㆍ오늘ㆍ내일」을 진단, 한국교회와 가톨릭 신문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모색코자 한다.(편집자註)
▲司會=오늘 이 자리에 나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도자들 대표해서 수녀장상연합회 회장이신 김안젤라 수녀님, 평신도를 대표해서 유현석 변호사님, 그리고 제가 성직자를 대표로, 이렇게 세 사람의 하느님 백성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톨릭신문이 1927년 4월 1일「천주교회보」로 발족했으니까 4월 1일에 꼭 60주년 회갑을 맞습니다. 정말 뜻있는 날이죠. 비단 신문사측의 경사만이 아닙니다. 이 신문이 처음에는 하나의 청년회 기관지로 출발했으나 그 후 교구 기관지, 그 다음에는 명실공히 한국교회 유일의 초교구적인 가톨릭신문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한국교회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경사라고 봅니다.
앞으로 이야기를 해나겠읍니다만 가톨릭신문은 60년 동안 두 차례나 자의에 의해 또 타의에 의해 폐간당했고, 재정난ㆍ원고난ㆍ인쇄난 등의 시련을 겪으면서 발전해왔읍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립의 길로 들어선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듭니다. 이같은 기쁜 환갑을 맞는 것에 대해 우선 축하 소감부터 한 말씀씩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교회사의 증인
▲金=먼저 가톨릭신문이 60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한국교회 2백주년에 비겨볼 때 3분의 1에 해당합니다. 이는 명백히 한국교회역사를 하나의 큰 증거품으로 남기는 좋은 교재가 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다시 말해 신문이 창간돼서 60년 동안 지켜왔다는 것은 한국교회 역사에 크게 이바지 하는 좋은 증거품이라고 보며 그런 뜻에서 60주년은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는 경축이라고 생각합니다.
▲司會= 수녀님이 오히려 저보다도 더 신문의 사료적인 가치에 대해 말씀해 주셨읍니다. 유 회장님의 소감은 어떠하신지요.
▲柳=아까 저보고 평신도 대표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평신도 대표가 될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1927년이니까 저하고 동갑이네요(웃음). 생일은 제가 9월이니까 동생인 셈입니다.
제가 태어난 해라서 그때의 일은 잘 모르지만 하여튼 한국 교회가 1백여년의 박해시대를 지나고 또 국제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뒷마무리를 하느라고 세계열강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부산하게 움직이던 시기였거든요.
우리의 경우 3ㆍ1독립운동 후 조선총독부가 한편으로는 온건책을, 이렇게 회유와 탄압을 겸해 쓰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이런 때에 가톨릭계통의 신문이 발간됐다는 자체는 바로 한국교회가 눈을 뜨게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죠. 그 후 여러 시대로 구분할 수 있겠읍니다만 우선 그때 그 시대의 교회 상황ㆍ진로를 비교적 잘 전달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으로 기대하는 바가 더욱 큽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60년을 모두 환갑으로 경축하고 있으니까 마땅히 축하해야할 일입니다.
▲金=그런데 15년간의 휴간은 어쩔 수 없는 경우였겠지만 너무 아쉬워요. 휴간 당시의 우리나라 실정은 일제시대와 전쟁전 후 과도기로 신자들의 생활에도 열 가지 문제가 많았었다고 봅니다. 이런 시기, 사건이 많았던 시기에 휴간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아쉬움을 느끼게 해요.
▲司會=오늘 주최측은 좌담회의 주제를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로 정해 한국교회의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것인데 제 생각으로는 가톨릭신문 60주년이기 때문에 주제를 좀 더 좁혀 교회언론을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의 전망으로 이끌어 갔으면 합니다.
▲柳=가톨릭신문은 처음에 언론의 여러기능 중 소식전달의 기능에서 시작, 점차 넓혀갔다고 봅니다.
▲司會=원래 가톨릭신문은 「소식보도」「의견교환」「보조일치」라는 3대 목표를 내세웠읍니다. 1949년 복간되면서 「조국성화」라는 한 가지 목표가 추가됐는데 이속에는 시대적 배경이 뚜럿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건국 1년 후이고 대구교구로서는 새 교구장을 맞이했읍니다. 최덕홍 주교가 바로 이해에 탄생했는데 최 주교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정상이고(노 대주교는 서리였읍니다만) 또 마침 대구 출신입니다. 그래서 아마 대구에서는 대단히 열광적이었고 신문이 복간될 수 있는 충분한 뒷받침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러한 연유로해서 뭔가 나라를 생각, 성화해야겠다는 새로운 목표가 추가됐다고 보여집니다.
오늘 좌담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제가 가톨릭신문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 말씀드리고 앞으로의 방향을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우선 가톨릭신문의 역사적인 윤곽부터 말씀드리겠읍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1927년 4월 1일 남방천주교 청년회 기관지로 발족, 1931년 교구설정 1백주년에 남방 천주교회보로 승격되고 동시에 교구기관지로 승격됩니다. 그 후 교구 기관지를 넘어 초교구적으로 한국가톨릭교회 유일의 신문으로 발전, 오늘날까지 계속돼 오고 있읍니다.
제호도 상당히 발전을 했읍니다. 처음에는「천주교회보」로, 복간 후에도 그대로 계속 사용하다가 1953년 6개월간 「가톨릭신보」로 변경됩니다. 이때부터 교구의 제한성을 벗어나 「가톨릭」으로 향하는 의욕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러면서 「가톨릭시보」로 변경됐는데 이때도 「가톨릭신문」으로 하고 싶었읍니다만 당국에서 주간지는 「신문」이란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해서 어쩔 수 없었읍니다. 현 전달출 신부가 사장이 되면서 1980년 「가톨릭신문」이란 제호를 쟁취, 오늘날 「가톨릭신문」으로 발전했읍니다.
가톨릭신문은 또 그동안 두 차례 폐간됩니다. 1933년부터 49년까지, 이 시기는 또 가톨릭 액션이 한창 성행하던 때였읍니다. 당시 5개 교구 출판위원회가 구성돼 여기에서 한 결의가 나왔읍니다.
1927년 대구청년회에서 기관지를 내니까 6개월 후 서울 청년회에서 이에 질세라 「별」이라는 기관지를 발간, 이들은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고 경향잡지 발간도 지속되고 있었죠. 그런데 이같은 경쟁을 본 주교님들은 신자도 얼마 안되는데 많은 신문ㆍ잡지를 발간하느니 하나로 통일, 건전하게 발전시키자는 생각으로 「경향잡지」는 기관지로 그대로 두고 「별」과「천주교회보」를 폐간시키고 그 대신 「가톨릭 청년」이라는 새 잡지를 초교구적으로 탄생시켰읍니다. 그러다보니「천주교회보」와 「별」지는 억울하게 없어질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이러한 주교들의 결의 후 평양교구에서「가톨릭조선」을 발간하는 바람에「가톨릭 청년」은 이에 밀려 스스로 물러나게 됐고「가톨릭조선」도 용지난ㆍ재정난 등으로 일제말기에 스스로 없어지게 돼요. 결국 모두가 죽게 됐죠. 이런 와중에서 「천주교회보」가 1949년 복간됐다는 것은 장한 일이예요
공의회 후 언론 중요성 인식
두번째 폐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데 6ㆍ25때 6월부터 10월까지로, 인쇄를 담당하던 대건출판사가 공군인쇄소로 징발돼버린 것입니다.
▲柳=여러 난관을 끈질기게 극복해 왔군요.
▲司會=어쨌든 신문이 매스미디어라는 측면에서 신문사측에서 내세우는 4대 목표가 어떻게 잘 구현됐는가, 복음전파를 위한 일종의 문서선교, 사목방법의 하나, 또 사도직 실천의 하나라는 점을 회고해보며 앞으로의 진로를 말씀해주시고 특히 언론이 교회 내 여론 형성에 얼마나 기여 했는가 등을 말씀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교회언론이 발전하려면 교회당국의 적극적인 관심이 있어야하는데 상당히 애로가 많죠. 역시 보도의 자유랄까, 교회 당국과의 관계 등. 과연 교회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매스컴의 중요성을 인식, 육성했느냐, 신자들에게도 올바른 사용을 계몽시켰느냐 등등.
또 활용자 이용자 독자들이 매스컴의 중요성을 인식, 협조하고 관심을 갖고 육성했느냐, 이같은 내용으로 진행시키면 방향이 나올 것 같습니다.
▲柳=신문 모습도 역시 그 시대, 시대의 교회 모습을 반영할 수 밖에 없어요. 8ㆍ15해방 당시까지는 우리 교회가 개인의 신심 면에 치중했다고 볼 수 있고 해방 후 공의회전까지는 눈을 뜨는 시기, 그러나 교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죠. 그러다가 1965년 공의회 이후 1970년 유신까지 고민의 시대, 그후부터 對사회적인 발언을 하게 돼 교구적인 색채보다 한국 전체 교회 모습을 보여 왔다고 봅니다.
▲司會=신문사 측에서도 인정하는 이야기지만 공의회가 활기를 불러 일으킨 것만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단 김수환 추기경님의 역할도 컸다고 봐요. 가톨릭 신문 사장 재직시 공의회를 소개하고 번역하면서 공의회 바람을 일으켰으니까요.
또 2백주년의 교황방한은 무시할 수 없읍니다. 상당히 증면되고 칼라도 내고요
한국적 신심운동 일으킬 때
▲金=공의회 무렵, 저는 「로마」에 있었읍니다만 그때 가톨릭 신문사적으로 특파원을 보낼 수는 없는 처지였을 것이고. 제가「로마」에서 알고 있었던 유학생들이 주재 기자 역할을 담당, 공의회의 움직임ㆍ정보 등을 보내는 것을 봤읍니다.
▲柳=제2차「바티깐」공의회에서 매스미디어에 대한 교령이 나와 교회도 언론에 대해 확실한 눈을 떴다 할 수 있읍니다.
그전까지는 교회당국에서도 필요하다는 생각뿐이지,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볼 수는 없었잖아요. 지금은 가톨릭 신문이나 주보가 없으면 당장에 답답해서 못 살 시대가 됐으니까요.
▲金=충분히 말씀하셨읍니다만 공의회 이전 우리의 생활방법은 개인 중심적인 신앙 생활이라는 점에서, 넓게 초교구적인 면에서는 소극적이었다고 봐요. 그러나 공의회의 여러 가지 변화와 동시에 많은 신자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고 결국 그것은 매스컴 분야에서도 넓은 시야를 갖도록 해 개인 중심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한다는 면에서 보도가 더욱 가톨릭 적으로 돼갔어요. 결국 신앙생활의 변화가 가톨릭신문의 변화의 시기라고 동시에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司會=공의회와 관련, 긍정적인 말씀들을 해주셨는데 부정적인 면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1962년이 한국교회를 위해서는 두 가지 획기적인 해입니다. 공의회가 시작되고 또 공의회 직전 뒤늦은 감이 있읍니다만 정식교구로 승격, 대주교가 세분이 탄생하는 교계제도 설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금년이 교계제도 설정 25주년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 50만 신자가 지금은 4배 이상 늘었고 교구도 불어났고 모든 면에서 발전이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수도회가 많이 나오고 평신도 활동도 활발해지고 교회일치, 조선 교구 설정 1백 50주년 신앙대회, 교황방한,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 등, 이제는 세계교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읍니다.
그러나 교회 일각에서는 집단적인 신앙을 통해 가톨릭이 상당히 자아 만족을 하고 개선감을 느끼면서도 「이래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반성이 계속 일고 있읍니다. 복음화가 숫자적인 것만이 아니고 뭔가 교회 내 변화, 자신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면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얘기죠. 제2차「바티깐」공의회도 자신이 자아 의식을 느끼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 공의회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발전하려면 우리 스스로 자아의식을 가져야만 하는데 외부로부터 공의회라는 독창성 없는 것이 주어졌고 또 이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했읍니다.
그냥 엄벙덤벙 발전하다 보니 물량에 치우치게 됐고 자기 의식을 별로 갖지 못했읍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인 수도회가 얼마나 생겼읍니까, 외국에서 들어만 왔지. 또 한국적인 신심이 있읍니까. 꾸르실료ㆍ훠꼴라레 등도 외국적인 것이 아닙니까.
▲金=사실 좌담회를 위해 우리 수녀들과도 얘기를 했는데 60년대 가톨릭 신문에서는 좋은 것만 많이 보도했어요.
신부님의 말씀대로 많은 이들이 토착화, 한국적인 그리스도교적 생활 등을 부르짖고는 있으나 아직 안되고 있어요. 전례ㆍ성음악ㆍ성미술ㆍ건축면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가톨릭 액션단체가 우리에게서 순수하게 나오는 것이 있는가 생각해 볼 때도 역시 앞으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봐요. 이런 것은 매스컴, 특히 가톨릭 신문이나 잡지가 선도적으로 인도, 제시해나가야 한다고 봐요.
▲柳=신문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1년에 몇cm씩 쑥쑥자랄 때가 있는데 이런 경우 내실없이 키만 크죠. 안과 밖이 꼭 맞게 성장하지는 않잖아요. 우리교회도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읍니다만 무엇이 발전을 했는지, 결국 몸만 컸지, 속이 차지 않았다고 봅니다.
▲司會=그같은 의식ㆍ반성이 절대 필요하죠. 이것을 신문이 담당해야한다고 봅니다.
▲金=우리들이 2백주년을 맞으며 103위 성인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순수한 한국적인 사고방식,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데 외부적으로만 집중 준비를 했지, 한국적인 신앙을 그분들을 통해 연구해나가면서 토착화로 발전시키는 것에는 너무 소홀했다고 봅니다.
▲司會=수녀님 말씀대로 2백주년 평가에서 보면 일부에서는 잘됐지만 영적 풍요로움, 특히 한국적ㆍ문화적인 풍요로움이 없었다는 지적이 많아요.
우리는 또 1989년 세계 성체대회를 앞두고 있는데 이때는 뭔가 우리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봅니다.
▲柳=언젠가 2백주년 평가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2백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하고 한꺼번에 유례없이 103위 성인이 탄생해「정말 내가 가톨릭신자다」고 자랑할 만큼 축제분위기에 싸였었죠
2백주 평가보도에 미흡
교황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들은 그냥 듣기에는 좋은 말씀이고 지나가버렸지만 다시 되새겨보면 교황님이 무서운 분임을 느껴요.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화해는 너도 하느님께, 나도 하느님께로 가, 하느님 앞에서 만나자는 것이 아니겠읍니가? 나눔도 역시 내 것 모두를 내어준다는 교류가 담겨있다고 봐요. 증거도 마찬가지고요. 「네가 바로 증거해라, 네가 바로 순교하라」는 소리인데 과연 이 화해ㆍ나눔ㆍ증거를 어떻게 실행해 나갈 것인지, 교황님은 무거운 짐을 우리에게 지워주고 가셨어요.
20백주년을 기해 교회가 아직 내실을 못 갖췄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1989년 세계 성체대회도 있읍니다만, 외적 성장 못지않게 내실을 기해야겠읍니다. 토착화 문제도 그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죠.
또 토착화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토착화이며 무엇이 토착화인지에 대해 확실한 의식도 없어요. 주교회의 등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토착화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金=그런데 실제로 가톨릭신문을 볼 때 2백주년까지는 보도가 잘됐어요. 그러나 그 후로는 그것에 대한 반성, 평가, 동시에 신자교육, 예를 들어 교황말씀ㆍ103위 성인의 순교 정신 등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한 것 같아요. 우리 수녀님들도 같은 의견이구요.
▲司會=좋은 말씀해 주셨읍니다. 반성해야할 부분이 전혀 없었다고는 보지 않아요. 그런데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여기에서 지적해 볼 수 있을텐데, 한국 교회에 보도언론의 완전한 자유가 있는지 묻고 싶어요. 쓰고 싶어도 못했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지요.
실제로 교회 당국에서는 그저 잘됐다는 얘기만 했지 반성의 얘기는 한 번도 안 나왔거든요. 그런 가운데 과감히 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드네요. 여기서 교회당국과의 관계, 좀 더 주교님들이 관심을 갖고 보도의 자유를 좀 더 주고 비판을 하게해야죠.
▲柳=우리는 지금 103위 성인을 모시게 됐는데 이분들을 장식품으로만 갖다놓고 있는 셈이예요. 사실 요즈음 인권 기도회나 고문 추방운동을 하고 있지만 당하지 않은 분이 어디 한사람이라도 있읍니까? 그분들을 통해 고문을 없게 해달라면 고문당한 그 103위 성인들이, 당신들이 당한 것이니까 아마 하느님께 매달려 진짜로 증거해 주시리라 믿어요.
▲司會=성인이라면 우선 본받고 전구하기위해 있는 것인데 마치 자랑하기위해 있다는 말씀이죠. 성인 신심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은 성인에 대한 올바른 신심이 안돼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해요.
▲金=사회자가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지 모르겠지만 가톨릭신문이 창간될 때 「너희들이 이것을 창간하고…」라고 되어있어요. 너희들은 바로 청년들이고, 청년들이 이렇게 활발했다는 점이 무척 기뻤어요. 그런데 청년들에 의해 탄생된 이 가톨릭신문이 오늘날 헤매고 있는 청년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지, 청년들은 정말 가톨릭신문을 자기들의 안내 표시로 받아들이고 힘을 얻고 있는지 하면 청년들이 창간했다는 사실은 무척 반가운 일인데 어느덧 모르는 사이에 청년들과 멀어지는 신문이 됐다면 너무 마음이 아프니까요.
세계교회소식 보도 적어
▲司會=청소년들이 바로 이 민족의 앞날을 짊어질 일꾼들인데 저도 수녀님과 전적으로 동감하면서도 신문사측의 애로가 있을 것이라고 봐요. 처음에는 청년들 주도로 해나갔으나 성직자에게 넘겨지면서 성직자들의 생각이 다르다보니 애로가 있었을 겁니다.
▲金=신문을 보면 성직자가 책임을 맡고 있고 또 맡은 성직자에 따라 편집 방향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柳=교회홍보 수단으로는 서적ㆍ잡지ㆍ각 교구 본당 단위 회보 그리고 신문 등 4가지인데 신문이 아니면 다루기 어려운 것이 있지요. 그런 면을 살려 교회의 선도적 역할을 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리라고 봐요. 성서 주해 등의 연재물도 필요하겠지만 그런류는 잡지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볼 수 있거든요.
▲司會=역시 가톨릭신문은 신문이기 때문에 소식보도가 가장 중요하겠죠. 그 다음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선도하는 역할도 무척 큰 것으로 생각됩니다.
▲金=그런데 신문은 소식보도가 첫째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신문은 세계교회에 대한 소식이 너무 없어요. 오히려 일간지에 세계교회의 여러 소식이 먼저 다뤄지는 것을 보면 늘 안타깝기만 합니다. 국내소식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교회를 깊이 있게 보기에는 너무도 빈약한 면이 많읍니다.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앞으로는 유럽ㆍ남미 등지에까지 특파원을 파견하는 문제를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司會=현실적으로 보다 빠른 소식, 폭넓은 소식을 얻기 위해서는 통신을 많이 받는 길밖에 없겠죠. 지금까지 받아오던 피데스지, NC통신 등 교회 관계 통신 외에도 APㆍUPI 등 일반 통신도 받을 필요가 있읍니다.
사실 우리는 북한교회 중공 교회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모르지 않읍니까? 이런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소식을 통신들을 통해 폭넓게 보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와 함께 국내의 지역성도 탈피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대구신문」이라는 탈을 벗어야죠. 지금은 어느 정도 극복됐지만 아직도 편견을 갖고 있는 신자들이 많기에 지역성 탈피를 위해 조금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柳=지역성도 문제지만 시간성도 문제입니다. 일전에 일간지에서 해방신학에 관한 훈령을 보도한 적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왜곡시킨 부분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해방신학을 교황청에서 이단시하는 것처럼 보도됐죠. 그래서 혹시 가톨릭신문에는 정확한 내용이 실리겠지 하고 그 주급이 없었어요.
뒤늦게 2주쯤 지난 다음에 내용이 나온 것을 봤읍니다만 이미 그때는 일간지들의 영향으로 일반인들에게 『교황청에서 해방신학을 이단시, 단죄했다』는 인식이 박힌 상태였기 때문에 계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읍니다.
신속보도와 함께 일간지가 다루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가톨릭 신문이 밝혀주어야 할 사실 또한 많다고 봅니다. 어떤 제약 때문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톨릭 신문만은 일간지가 잘 다루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金=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꼭 짚고 넘어가야겠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세로 볼 때 신자수는 점점 증가하고 있지만 그 증가 숫자만큼 신자들이 교회 매스컴에 관심을 갖고 제대로 읽고 있는지 정말 의심스럽읍니다.
국민전체의 독서율도 문제되겠지만 특히 신자들 중 신문ㆍ잡지 등 교회 출판물을 읽는 신자들이 너무 적은 것도 큰 문제입니다.
▲柳=그동안 교회출판물 보급 주일을 정해놔도 마찬가지 아니었읍니까(일동웃음)
▲司會=좋은 점을 지적해 주셨읍니다. 신문이 잘 못한다고 탓하지만 말고 독자들인 우리 신자들이 관심을 갖고 신문을 육성해줘야 더 좋은 신문이 되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일본의 경우 사제들이 영세자들에게 입교기념으로 가톨릭신문을 구독시켜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얼마나 큰 관심입니까? 우리도 사제나 교리교사가 그 정도의 관심만 갖는다면 충분히 나아질 수 있읍니다.
▲柳=보급방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실제로 대자ㆍ대녀들의 영세, 견진 때 대부모들이 수 만원짜리 그림 등을 선물하는 것을 많이 봤는데 가톨릭신문을 구독시켜주는 경우는 드물어요. 한번 가톨릭신문을 구독시켜주면 1년 내내 선물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다음에야 대자ㆍ대녀들이 직접 구독하겠죠.
어떻게 보급하느냐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司會=가톨릭 신문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교회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게 됩니다.
먼저 유 변호사님께서 평신도로서 느끼고 있는 교회에 대해 한 말씀해 주시죠.
▲柳=표현이 맞을런지 모르겠지만 현재 한국교회는「조화된 교회」의 모습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과거에는 프랑스 사제들의 교육 때문인지 천당ㆍ지옥 등을 강조, 지나치게 내세 중심적 신앙관 곧 하느님과의 종적인 관계만을 갖게 했는데 지금은 거꾸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다 던져버리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다시 말해 횡적인 측면에만 지나치게 기울고 있다고 봐야겠죠. 이제부터라도 한국교회는 하느님과의 종적, 횡적관계를 슬기롭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金=공의회에서도 나온 이야기지만 수도자는 항상 사명감을 갖고 생활해야 합니다. 수도자가 거룩하게 살면 교회도 거룩하게 됩니다. 영적ㆍ내적 생활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감으로써 교회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각 수도회는 수도회별로 고유성을 살리면서 성실하게 사명을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도자들의 의무이며 한국교회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대상황은 늘 변하기에 수도자들은 그때 그때 기도 안에서 맞춰나가도록 노력해야하며 가난과 겸손과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할 것 입니다.
「조화된 교회」모습 갖춰야
▲司會=지금 수녀님께서 가난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현재 물적 팽창일로에 있는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보다 스스로 가난해 지는데 당면과제가 있는 것 같읍니다.
한마디로 가난의 토착화에 문제가 있다고 보겠읍니다.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곧 어떻게 가난해져야 하느냐는 것이겠죠.
▲金=한국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수도자들의 본당사목이 있지않습니까? 평신도들은 앞으로 각자의 전공별, 전문 직업별로 본당사목에 참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리라 봅니다. 본당활동은 평신도들이 충분히 잘해낼 수가 있다는 이야기이죠. 이에 반해 수도자들은 수도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 곧 영적 기도생활의 분위기를 본당 내에서 만들어 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수도자들의 삶 자체에서 기도 분위기가 우러나오는 것이 바로 수도자들의 전문분야일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자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며 그들을 위해 본당 내에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도자들의 전무분야입니다.
▲柳=가난은 물질이 없음을 뜻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물질에 정신을 예속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가난도 개인적인 가난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난이 돼야할 때입니다.
아직은 한국교회가 물질적으로 풍요하다고 볼 수 없겠지만 앞으로 물질이 풍부해지더라도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공동체 전체의 가난을 깨우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司會=유 변호사님의 말씀대로 정신적 가난은 무척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역시 물질적 가난이 나오기 때문이죠.
이제는 숫적으로는 신자가 많이 증가했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캠페인을 통해 뭔가 해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사순절 기간 동안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 공동체 전체의 나눔도 실천할 수 있지 않겠읍니까?
▲金=맞습니다. 본당마다 단체마다 그같은 나눔을 다같이 실천할 수 있겠죠.
그러나 누가 이끌어갑니까? 개인적으로는 성직자들이 우선 모범을 보여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司會=물질에 예속되다 보니 돈ㆍ돈ㆍ돈 이야기만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까 유 변호사님께서 언뜻 아직까지는 물질적으로 풍요하지 않다는 뜻의 이야기를 하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숫적으로 풍부하기 때문에 물질 또한 그렇지 않을까요? 앞으로 더 깊게 생각하고 개선해 나가야겠죠.
가난에 대해서는 이쯤 이야기하고 이제는 앞으로의 교회를 위해 바람직한 미래상, 특히 성직자에 대해 이야기해주시죠.
사실 교회에는 말씀의 식탁과 그리스도 몸의 식탁이 있는데 「말씀」보다는 후자인「성사」에 많은 비중이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성직자 중심으로 흐르지 않나 생각됩니다.
사회소식도 올바로 전해야
조금 더「말씀」과「복음」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 성직자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이 아니겠읍니까?
▲金=비단 한국교회 2백년역사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성직자중심의 교회는 오히려 신자들이 만들어오지 않았나 모르겠어요.
어떻게 보면 신자들이 너무 착해서 가난 속에서도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갖은 정성을 바치려하고 그렇기에 성직자들 수도자들이 점점 권위적이 돼가는 것이 아닐런지요.
한국이「성직자들의 낙원」이라고 이야기 듣는 원인중의 하나도 신자들에게 있다고 보여집니다.
▲司會=제 자신도 기대를 못받는 대표자에 들지만 지나친 활동주의 소위 텔포시대에 빠져 도대체 기도할 여유를 갖지 못하곤 합니다. 시간에 밀려 기도하거나 독서할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죠.
▲金=그래도 일을 많이 하면서 기도도 열심히 하는 사제들도 많고 또 평신도들도 있지않읍니까?
▲柳=근본적인 문제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양성방법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봅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성직자, 수도자양성은 온실 속에서 꽃을 키우거나 어항 속에서 금붕어를 기르는 것, 그 정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신자들에게 실망을 주지말아야 합니다. 한 사제나 수도자의 언행이 전체 성직자, 수도자들에 대한 인상을 흐리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항 속의 금붕어가 아닌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사람들 속에 같이 끼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활동이 너무 지나쳐서 신자들의 원성을 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교회 안에서만 안주하는 것도 지양해야 할 줄로 압니다.
이는 신학교나 수도원의 교육 때부터「신자들 사이에 함께한다」는 풍토를 배양시킴으로써 개선돼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잘못된 성직자관, 수도자관도 고쳐 나가야하지만 성직자ㆍ수도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고쳐나가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金=유 변호사님의 말씀대로 성소자들에 대한 교육은 무척 중요합니다. 어떤면에 있어서는 두렵기도 합니다.
신학교 교육, 수도원 교육이 중요한 만큼 그 교육이 잘못되면 일생의 문제로 남게 됩니다. 성직자ㆍ수도자 양성문제는 한국교회 당면과제 중 그 어느 것보다 심각하게 고려돼야 합니다.
▲司會=수녀님께서는 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회장으로 계시니까 수도자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이 있으시리라고 여겨집니다. 또 그만큼 책임도 있겠죠.
우리 교회가 바라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2세에게 있지 않겠읍니까?
▲柳=신학교나 수도원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도 절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수범이 될 현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범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간혹 사제들이 피곤하다면서 신자들의 간절한 요청을 무의식중에 외면할 때가 신자들의 가슴에 얼마나 큰못을 박는지 곰곰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司會=지금까지 교회에 바라고 싶은 것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읍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가톨릭신문 자체에 대해 부탁하고 싶은 내용들을 간추려 말씀해 주시죠.
▲柳=기사내용도 문제지만 편집에서부터 우선 개선돼야 할 것으로봅니다. 신문을 폈을 때 눈에 확 띨 수있는 편집이 돼야하는데 그 점에서 많은 연구작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우선 오자를 없애야 합니다. 오자는 신문의 품위뿐 아니라 신빙성에도 문제를 가져옵니다. 또 컷이나 견출을 잘 뽑아야겠죠. 독자들이 읽고 싶도록 만들 수 있어야합니다.
▲金=한국 국민들은 현재의 언론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고 듣곤합니다. 신문은 보지만 불신이 깊이 사로잡고 있기에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 가톨릭 신문만큼은 진실해야합니다. 물론 현재 주어진 언론 상황하에서는 모험과 위험이 뒤따를 수 있겠지만 가톨릭신문은 진실한 신문, 믿을 수 있는 신문이라는 인식을 줘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중요 뉴스를 다룸에 있어 가톨릭 신문은 긍지를 갖고 사설ㆍ논평 등을 통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때 사건이나 정보에 대해 뚜렷하고 확실한 방향을 제시하는 기사들이 더 많아야겠읍니다. 이는 비단 교회 소식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소식도 해당되겠죠.
신자들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종교지라 하더라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을 위해 그들이 올바른 식견을 가질 수 있도록 가톨릭신문은 그 역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司會=적절한 지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자 개인으로 꼭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읍니다.
신문은 현대적 사료(史料)로써 무척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결국 사료로 남게 됩니다. 기자들이나 편집인들은 올바른 역사의식과 깊이 있는 교회 의식을 갖고 취재와 편집에 임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와 가톨릭 신문에 대해 바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지만 앞으로 우리 자신들로부터 스스로 고쳐나가야하겠다는 것을 오늘 이야기의 결론으로 대하도록 하겠읍니다.
오랜 시간 진지하게 말씀나눠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金ㆍ柳=좋은 말씀 많이 들었읍니다. 수고하셨읍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