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사실은 예수를 기억하여 성찬을 거행하고『이를 행하라』는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똑같은 류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하고 그리스도께서 식탁에서 하셨던 것과 같이 똑같은 류의 음식자리 손님들하고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의 우리가 고기를 절식함으로써 어느 정도 책임을 질수 도 있는, 빤히 내다보이는 세계의 굶주림이라는 스캔들에 맞서지 않은 채 미사를 거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마도 타성화와 의식화의 철도일 것이다』
마지막 만찬은 희생으로서의, 그리고 성스런 어떤 것-세속적인 세계에서 떼어 놓여 졌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분의전인성을 아버지의 삶과 의지에 맡겨 열어 드렸다는 의미에서-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대한 상징이었다. 그분의 전생애는 희생적이었고, 거룩하였다.
예수께서는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바꿔놓으셨다. 그것은 더 이상 분리된 성스런 세계를 가리키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오히려 인성 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현존과 권능, 죄의 죽음에서 남자와 여자 모든 이들을 구해 내고, 그들을 하느님과, 그리고 그들 서로가 화해케 하는 하느님의 현존과 권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거록 함은 그리스도의 몸 전체, 믿는 이들의 공동체, 그리고 신실한 성인들이 일치를 나누는 자리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영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전생애와 사명을 상징하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눌 때 그 거룩함이 그들에게 전달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은 주 예수의 부활한 몸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성찬에서 전달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것이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그분과의 일치, 결합에 이르는 믿는 이들의 몸이기도 한 것이다.
마지막 만찬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왜 그분 백성 중에 육화하게 되셨는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참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 주는 상징적인 규정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면서 그분은 그들에게 당신이 행하신 것을 행하라고, 당신의 삶과 역사를 이어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자신의 몸이 되라고 명하셨고, 이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죄스러움에서 건져내져서 상처를 낫게 하고 사람들을 고립과 소외에서 구하고 세계에 생명을 가져다 주고사람들을 하느님과의 친구에로, 서로간의 친교에로 이끌어 감으로써 다른 이들과 더불어 나누는 충만한 삶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죄의 노예상태에서, 그리고 죄의 노예상태에 그 뿌리를 둔 다른 여러 형태의 노예상태에서 그분의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하여 육화하시게 되었다.
만일 성찬이 완전하게 거행되려면 교회는 반드시 그와 똑같은 류의 해방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자체가 죄로부터 구해져야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고난 받는 종이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교회 역시 그리스도와 같이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생명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교회는 세계 내에서의 자신의 명망이나 위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야하고, 그리스도가 그러셨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중개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그리스도의 영의 권능을 통한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죄는 가장 커다란 악으로서, 인간성의 핵심을 강타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의 해방은 틀림없이 개인에 대해서는 물론 사회적인 수준에서 역시 효과를 미칠 것이다. 성찬에서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 그분의 현존을 실제화하여, 그것을 거행하는 가운데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들에게 자신과 같이, 즉 다른 그리스도들이 되도록 요청하게 된다면 그 기억은 참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들이 상처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 하느님과 자기 동족에게서 그들을 지켜주었던 거짓된 안전장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가 복음서의 경우 마지막 만찬사화에 이어 곧 바로 권능과 명망을 놓고 제자들이 논란을 벌이는 기사(루가 22, 24~30)가 뒤따라 나온다. 그리스도는 크게 되는 것에 대해 마음 쓰는 그들을 책망하시고 나서 이렇게 이르신다.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한다』(26절). 제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오늘날 만일 세계내의 불의와 억압의 구조하고 연루되어 있다면 사심을 품지 않고 섬김에 투신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는 무엇보다도 요한 복음서에 잘 드러나 있다. 그 대목은 예수께서 제자들 발을 씻기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서, 우리는 여기서 성찬 제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이 맥락에서는 발을 씻기는 것이 공관 복음의 만찬가사에 나타나는 설정 사회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제시되어 왔다.
이는 성찬과 섬김 간의 연계를 보여주는 요한의 생동적인 방식이다. 그것은 성찬의 전 면모를 드러내주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요한은 이 기사를 그분이 제자인 그들에게 하셨던 것을 이제 그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서 해 주어야 한다는 명령으로 끝맺는다(요한13, 15). 그런데 이 명령을 공관 복음에서의 경우『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라는 성찬 명령과 대를 이루는 명령인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 중에서 이 부분을 우리가 우리자신을 사랑하는 대로가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 서로가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의 위대한 사랑계명을 상기시킴으로써 마무리 짓는 사실 역시 지극히 시사적이다. 『제자 각 개인이 그들 안에 살고계시는 예수의 사랑을 체험한 정도에 따라서 만이 남자든 여자든 그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 체험에 참여할 수가 있다』그분 사랑의 역동적인 효력이 상징적으로 표출되는 것은 바로 그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동에 의해서라고 하겠다.
월터 브류그만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섬김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남기신 도구는 수건과 대야였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도구가 업무를 규정하고 특정 짓는다. 만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종의 도구를 위탁받았다면 그들은 오로지 종의 일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수건과 대야는 아무 주인도 하지 않을 그런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쓰이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들은 개인 주체적이니 주의를 요하는 것으로서 때 묻은 인간성차원과 관련하여 쓰이는 도구다. 수건과 대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막중한 요청을 가한다.
우리는 때 묻고, 때로는 전혀 내키지 않는 인간성차원과 관련, 접촉하도록 사명을 부여받았고, 사랑 깊은 주의를 기울여 우리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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