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통해 진정한 一致이뤄야 - 하나되는 아름다움 <김수환ㆍ추기경ㆍ서울대교구장>
「하나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하나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즉 일치의 아름다움이라 생각된다. 작년 아시안 게임에서 우리가 펼쳤던 매스게임의 아름다움, 103위 성인 시성식에서 보여주었던 1백만 신자들의 일치된 아름다움을 우리는 연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깊은 의미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며 인생의 희노애락을 같이하는 아름다움. 다시 말하면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나아가 깊은 믿음에 바탕을 둔 초자연적 사랑의 수도회와 교회 공동체안의 사랑. 때로는 민족적, 인종적인 차별을 초월해 같은 믿음 속에 하나되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사랑까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이같은 사랑을 초대교회에서 볼 수 있다.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해 기쁘게 땅과 집을 내놓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나눔의 정신으로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에게는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멸시하고 사상과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 등을 돌리는 사회를 우리는 역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및 사상의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남북으로 갈라져야했던 우리나라도 본래는 하나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내왕이나 소식전달을 할 수 없고 동족상잔의 비극과 헤아릴 수 없는 이산가족의 슬픔과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되는 아름다움이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없이 참된 삶,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본성상 사회적 존재로서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남녀의 사랑 즉 부부의 결합없이 자녀는 태어날 수 없고 음식을 먹고 의복을 입으며 집에서 생활하기 위해 지식을 전수받기위해, 많은 인간과의 끊임없는 상호유대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본성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습,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서로가 사랑의 나눔을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가정을 이루며, 자녀를 낳고, 형제적인 사랑으로 서로를 격려한다. 나아가 이웃에까지 그러한 사랑을 파급시켜 온 인류의 일치와 화목을 꾀하여야 한다.
우리는 특히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하면 인종과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사랑을 펼 수 있을 때 그를 인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라 부르게 된다. 이와같은 가장 아름다운 인간,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들 수 있다.
모든 이들의 형제로서, 벗으로서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 고통 받고 소외 받는 이들을 위해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신 예수. 요한복음 11장 52절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민족뿐만 아니라 흩어져있는 하느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죽는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전 인류의 일치를 위해 하나되는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당신 스스로 말씀과 삶으로써 증거하고 계신 예수. 그래서 직접 사도를 뽑고 교회를 세우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소명을 받은 교회는 불의가 없는 세상, 소외받고 고통받는 자가 없는 세상, 인권유린이 난무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올해는「성체와 교회의 해」이다. 이는 성체성사를 베푼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를 사랑하며 주님 안에 하나 되어야 할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또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당신 몸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을 본받아 모든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그래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위로와 힘과 치유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답겠는가? 특히 요즘과 같이 도시와 농민의 격차,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고 정치적으로까지 의견대립으로 끊임없는 싸움과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현실 속에서 진실로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해줄 수 있어 참된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분단의 장벽을 넘어 이북동포에까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나아가 온 세계 모든 이가 인종과 민족과 피부색을 초월하여 형제적인 사랑으로 주님 안에 일치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이것은 비록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스도 교회의 이상이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지금도 수난의 길을 걷고 계신다. 우리의 냉대와 멸시, 무관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그들의 아픔을 나누고 계신다. 우리 자신도 일치를 소망하는 꿈과 동경을 품에 안고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사순절의 이 안타까운 시기를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세상에「빛과 소금」역할 <한용희ㆍ한국평협 회장>
오늘의 주제는「교회는 왜 세상에서 빛과 소금, 누룩의 역할을 해야하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이다. 여기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너희는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마태오 복음(5, 13~16)에 있다.
이 말씀은 촛불과 소금이 자기를 죽이면서 남을 살리듯 신자들도 남을 위해 희생과 봉사로써 거듭 죽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순절을 맞아 우리 교회, 신자가 얼마나 촛불,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한국 사회를 위해 썩어 갔는가라는 자성의 물음으로 바꿔볼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따르려 했는가? 우리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자. 가톨릭교회의 2천년 역사 중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은 초대 교회 때를 포함, 일부에 불과하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중세 교회의 부패상, 종교 개혁,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들이 교회의 성작과 제의를 내팽개친 사건은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이것은 교리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호교론에만 치중, 교회가 제일이라며 세상을 등한시 했다. 또한 신학적인 면에서도 성(聖) ㆍ속(俗) 이원론을 주장, 속된 세상이 썩어가더라도 우리교회만 보속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교회의 모든 것이 전례에서 끝난다는 생각하에 오랫동안 세상을 외면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전통에 하나의 충격파가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산업혁명이었다. 주요사회세력으로 등장한 노동자들은 교회에게『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교회는 가진 자 편에서 우리를 압박하지 않았느냐』는 항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에 교황레오 13세는 1891년 혁명적문서「노동헌장」을 발표, 교회는 노동자의 권익, 권리 획득을 위해 강력하게 발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문제를 다룬 최초의 교황회칙이 등장한 것이다.
이어 교황 삐오 11세의「사회정의 헌장」과 요한23세의「어머니와 교사」「지상의 평화」등이 발간되었고 그 전통은 교황 바오로6세, 요한바오로 2세까지 이어지고 있다. 교회는 단순한 전례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ㆍ사랑ㆍ전례가 삼위일체된 공동체임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정의의 문제, 인간이 자기의 권리를 인정받고 있느냐하는 인권의 문제와 연결된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일미사에만 참여하는 소극적 신앙으로는 부족하다.
70년대 이후 많은 신자들이 핍박받으며 인권보장을 외칠 수 있었던 적극적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관련, 1976년 정평위가 발간한「교회와 인권」, 제2차 바티깐공의회「사목헌장 76항」은 『인권주장이 복음적 행동과 통한다』는 지침을 제시해준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가 주장하는 인권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교회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주장한다. 신체의 자유가 첫째요, 둘째는 생존권의 문제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한 인간은 천부적인 인권을 지닌 신비적 존재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제 몸을 마음대로 가누고 살 권리를 침해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박조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얼마 전 농민 폭행 사건은 전형적인 실례라고 볼 수 있다.
「양심의 권리」,이것은 교회가 가장 중요시하는 권리이다. 양심이 보장될 때 비로소 인권도 보장되기 때문이다.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로서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 지학순 주교에서 최기식 신부로 이어지는 일련의 양심선언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진실한 보도를 들을 권리」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언론, 연구, 학문의 자유가 포함 된다. 성경에서도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이며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적 권리를 활용, 진실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뒷받침해 준다.
그렇다면 이런 인권의 보장을 위해 교회는 어떻게 투신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 세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일치된 모습으로 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고독한 외침은 헛된 것이다. 이렇듯 교회가 한마음이 되어 뭉칠 때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권리와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냉정히 서로를 돌이켜보며 얼마나 교회의 사명에 용기있게 따라왔는가를 반성해보아야 한다. 하느님을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편안하고 안일한 삶이 아닌 용기와 모험으로 점철된 험로(險路)이기 때문이다.
세째로 이 모든 운동은 성직자ㆍ수도자보다는 평신도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야만 한다. 공의회 문헌도 세상 인권에 앞장서는 것이 신자의 임무라고 말하고 있다. 평신도들은 경제ㆍ문화ㆍ정치ㆍ예술ㆍ사회 등 현세 안에서 각 방면을 복음화 해야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신앙이란『인간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자성의 물음이다. 이것은 세상의 몰가치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야한다는 당위의 답변으로 이어진다. 사순절을 맞아 진정한 회개의 의미를 되새겨보며「내가 썩어야 세상을 살린다」는 평범한 진리를 명심해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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