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축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위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침묵 속의 하느님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서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시는 세계 제2차 대전 중 독일의 쾰튼 땅에 군사용으로 건설된 지하 동굴 속에 새겨져있읍니다.
우리는 누가 이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를 쓰신 분이 얼마나 깊은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읍니다.
전쟁의 막바지에 어둡고 습기 찬 동굴 속에서도 이 분의 눈은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었고 이 분의 마음은 따뜻한 사랑에 차있었고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듯 침묵만 지키시는 절망과 공포 속에서도 이 분의 믿음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것이었읍니다.
그 전쟁은 오래전에 끝났읍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는 또 다른 전쟁들이 있습니다. 민족과 형제를 갈라놓은 사상의 차가운 대립,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기본권의 뜨거운 투쟁, 먹고 살기위한 생존의 처절한 경쟁… 이런 격랑 속에서 우리는 쉽게 좌절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움마저 쌓이기도 합니다.
부활대축일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무죄하면서도 참혹히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읍니다. 그러나 전혀 뜻밖에 휑그렁 비어있는 무덤을 보았을 때 그녀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읍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잘 모시고 그분께 대한 마지막 정성으로 향유를 바르고 싶어 했던 막달레나는 망연자실 사도들에게 뛰어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읍니다. 어디다 모셨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죽은 모습이나마 다시 볼 줄 알았던 마지막 희망, 한가닥 위안마저 앗아간 듯한 빈 무덤에서 우리는 또한 어둡고 암담한 우리 사회의 현실의 반영을 보게 됩니다.
무참히 깨어진 改善의꿈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 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요 힘만이 있고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읍니다.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가 정략의 도구로 쓰여지고, 보다 밝은 정치의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되었던 헌법 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아래 무참히 깨어졌읍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하였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고뇌에 찬 결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는 슬픔을 안겨주었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큰 고뇌로 가득차게 되었읍니다.
이 땅위에는 다시금 최루탄이 그칠줄 모르고 터지며. 국민의 눈과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되었읍니다.
병든 사회 속에서 범죄는 날로 흉포해지고 병든 법치 속에서 인권유린이 다반사가 되어, 드디어 성고문의 충격은 고문살인의 경악으로 이어졌지만 사회에서나 옥중에서나 인권보호와 처우 개선의 약속은 허공에 뜬 구호에 그칠뿐입니다.
또한 UN이 제정한「살곳 없는 이들의 해」를 맞이하였는데도 철거민은 재개발의 뒤안길에서 울고, 호황 속에서도 어제보다도 나은 것 없는 서민의 하루엔 노동의 피로만 겹쳐가고, 생계의 막장이라는 탄광촌의 하늘마저 불황의 검은 구름이 가리고 있읍니다. 참으로 진실도 없고, 정의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가난한자 약한 자에 대한 배려도 인정도 없는 황량한 풍토위에 우리는 서 있게 되었읍니다.
마치 빈 무덤 앞에 선 막달레나처럼 당황과 혼란과 슬픔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을 원망하게 됩니다. 주님은 과연 어디 계십니까? 주님을 어디에 모셨읍니까?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읍니다. 막달레나의 다급한 보고에 접한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 갔읍니다. 그리고 그들은 차례로 용기있게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가「믿게」됩니다. 그들이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은 빈 무덤 뿐이었읍니다. 그곳에는 침묵과 공허만이 지배하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깊이 깨닫게 되었읍니다. 죽은 예수는 부활하여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더구나 오늘 복음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적혀 있읍니다. 실망과 좌절에 젖었어도 빈 무덤을 지키며 울고 있는 막달레나에게『왜 울고 있소? 누구를 찾고 있소?』하고 물으시며 막달레나의 이름을 친히 불러 주시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팔이 울리고 환영 인파가 환호성을 울리는 가운데 화려하게 등장하는 분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황량한 무덤가에서 당신을 찾는 이에게 조용히 몸을 드러내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세상에 지치고 삶에 실망할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읍니다. 억울하고 슬플 때, 괴롭고 아쉬울 때, 자신의 한계와 무기력을 뼈저리게 느낄 때, 주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따로 불러 위안을 주시며 당신께로 모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인간의 눈에는 빈 무덤처럼 보이는 이 세상위에 현존하시며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인류의 역사를 살피시고 이끌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초대 교회 하느님 나라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화됩니다. 한때 비겁하던 제자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까지 바쳐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이 되었읍니다. 그리고 이 주님을 믿고 그 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이제 인종이나 민족이 차별, 자유인이나 노예의 차별도 없고, 남녀의 차별도 없으며 모두가 형제 자매요,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갈라3.28 참조)
참으로 인간이 변하고 사회가 변합니다. 이기주의와 죄악의 세상이 사랑과 진리와 정의로 가득찬 하느님 나라로 변화됩니다. 믿는 이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었고 모두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초대 교회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된 하느님 나라 그것이었읍니다(사도행전 2.43~47: 4.32~37참조).
누구인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이 형제로 보이면 그것으로 새날이 밝아오는 것이라고 하였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이는 누구든지 이같이 모든 이를 형제로 보고 사랑하는 새 사람들이 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인류역사에 새날이 밝아올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처럼 변화되어야 합니다. 특히 성체와 교회의 해인 올해 우리는 모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뿐 아니라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남김없이 주시는 그 주님을 모심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고, 동시에 그 사랑을 본받아서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하고 나눔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형제적 공동체인 교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眞實을 단념해선 안돼
그리하여 빈 무덤과 같은 오늘의 현실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살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정치가 아무리 허무하다하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하며, 정의와 진실을 단념하는 이유가 되지못합니다.
또한 아무리 모두가 이기주의에 흐르고 세파가 몰인정하여도 우리들마저 사랑을 실천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되지못합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같은 세상 속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과 진리를 증거하시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읍니다.
그와같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일진대 오늘의 현실이 허무해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이 사회 이 땅 우리나라와 민족의 인간화와 참되고 값진 삶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정의를 구현하며 무엇보다도 사랑을 몸소 사는 인간이 되어야합니다. 그럴때에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빈 무덤처럼 허망해 보이는 이 땅에 현존하심을 깨닫게되고 또한 이 땅의 모든이에게 이 부활을 힘차게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 축일입니다. 또한 부활절은 그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축일입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는다 해도 태양을 볼 수 있고,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사랑의 힘을 믿을 수 있고 하느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 같은 때에도 하느님을 믿고 희망할 수 있는 신앙의 축일입니다.
언산에도 진달래 꽃 피듯 인간성 회복 이루어질 것
이 신앙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사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 빛이신 주님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정치가 아무리 허망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이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 및 사랑의 불을 지피며 살면 주님은 억압된 민중의 짓밟힌 인간성을 반드시 살려 주실 것입니다. 마치 얼어붙었던 산과 바위틈에서 이 봄에 진달래 꽃이 환히 피어나듯이, 그렇게 이 땅에도 인간다운 삶의 꽃이 피어나도록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 생명의 물을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1987년 부활절
서울대교구 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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