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苦痛은 신앙인의 또 하나 신비 - 절망 뛰어넘은 소망의 삶 - 박신언 신부(서울대교구 관리국장)
가끔 주교관에서 복잡한 명동거리를 내다보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가고 있다는 것은 각자 나름대로 추구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인간들은 무엇을 얻기위해, 무엇을 추구하고자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돈인가? 명예? 권력? 지식? 아니면 진리를 얻기 위해서인가?
이 세상 수억의 인간들은 수세기를 살아오면서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오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모두 3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아무리 부유한 집에서 높은 권세를 떨치며 사는 사람이라도 자기 나름의 십자가 즉 그들만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실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째로,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죽음의 길을 인간이면 모두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같은 인간의 3가지 공통점에서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는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통이란 일반적으로 신체적 혹은 정신적인 불만족에서 생긴다. 내가 스스로 만든 고통이 있을 수도 있고 타인에 의해 주어지는 고통도 있다. 경제문제 때문에 혹은 건강 때문에, 가정문제 때문에, 혼자의 고독 때문에 오는 고통 등 인간이 사는 주변에는 온통 고통의 조건들이 가득차 있다. 고통을 벗어나고자 애를 쓰면 새로운 고통이 우리에게 엄습해 오곤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비관하여 자포자기에 빠져들고 어떤이는 현세의 쾌락에 도취되어 인생고에 발버둥치는가 하면 또 어떤이는 허무주의에 빠져 자멸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절망과 고통앞에서 좌절해버릴만큼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우리에게는 고통에 대처할 용기가 있고 절망에서 희망을 찾을 줄 아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혜로써 혼미한 상태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자유가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면 거기엔 마땅히 책임이 따른다. 책임 뒤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 고통을 극복하여야 진실한 승리와 영광을 맛 볼 수 있다.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는 새는 영원히 날지 못한다는 철칙을 알고 있듯이 인간이란 고통없이는 하느님 품에 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지금부터 18년 전 신학생 때 소록도에 가본 적이 있다. 그곳에 가서 놀란 것은 그들이 비록 절망상태에 있는 환자였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절망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한가닥 소망을 갖고 힘 있게 살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안다는 것, 지금도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같은 희망 속에 살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희망을 하느님께 두는 사람과 물질에 두는 사람과의 차이인 것 같다. 물질에 희망을 둔 사람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좌절과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지만 희망을 하느님께 두는 사람은 모든 잘못의 탓을 자신에게 돌리고 어떻게 고통을 잘 참아 받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설사 일생동안 아무런 고통없이 평안만을 누리고 산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가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실컷 먹고 뒹구는 돼지보고 행복하게 보인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때 묻은 영혼의 때를 벗기고 하느님의 주신 해맑은 영혼을 고이 간직해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의 깊고 심오한 의미는 오히려 고통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고통은 하나의 신비이다.
고통을 통해서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일치를 얻을 수 있다.
십인십색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가족 중에 한 사람만 아프면 모두가 이를 해결하고자 마음을 모으는 것과 같다. 또 고통은 자기의 참 자아를 발견하게 해준다. 즉 자기의 한계, 욕심의 한계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이란 좌절과 절망 속에서 생명과 희망을 찾을 줄 아는 지혜를 갖고 있다.
이는 곧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그 속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모든 신자들이 보속, 극기, 희생하므로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사순절에, 생활에서 오는 여러 어려움을 신앙안에서 잘 참아 복된 부활을 맞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뼈속에 갇혀있는 주의 말씀 - 말씀에 대한 믿음이 구원의 길 - 조화선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예레미아는 큰 아픔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에 가장 적합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예언자이다. 이 시간에는 그의 예언활동을 중심으로 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자.
예레미아는 유다 왕조의 가장 어두운 시기(BC627~587)에 예언활동을 했다. 긴박한 전쟁의 위협과 쿠데타, 우방으로 간주된 강대국에의 의존, 친 이집트파와 친 바빌론파로 갈라진 국론, 우상숭배와 폭력, 사회 각계층에 만연된 부정부패로 극히 혼란스런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 예레미아는 거역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에 붙들려 큰 희생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분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전생애를 바친 말씀의 사람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는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극적인 표현으로 예고했다. 또한 거듭 예루살렘이 당할 참변과 그 백성의 잘못을 고발했다. 예언자의 절규는 말뿐 아니라 여러 상징과 예언자 자신의 삶으로 선포됐다. 귀한 모시잠방이를 썩혀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백성의 멸망을 예고하고, 자신의 목에 맨 멍에로써 바빌론에 예속될 것을 예표했다.
그러나 그 백성은 당면한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강대국에 의존해서 재앙을 물리치려고만 했다. 예언자는 이를 창녀에 비유, 결국 강대국들이 그들의 생명을 노릴 것이라 경고했다.
예언자는 백성을 그런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 회개를 권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언자의 말씀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그의 예언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갈기갈기 찢어 불에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백성과 지도자들은 하느님에게서 구원을 찾기보다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정치 세력에만 의존했던 것이다.
이에 예레미아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어수룩하게 주님의 꾐에 넘어가 욕을 먹고 조롱받는다」(예레미아서 20.7~8)고 하느님께 불평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예레미아는 하느님의 위력 앞에서 다시금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20.9)
예언자의 고백은 하느님의 말씀은 멀리한 채 말을 조작, 통제, 억압, 위증하여 상처받고 갇히고 죽어가는 오늘의 상황에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거친 땅이 회복될 희망은 오로지 참 삶의 길이요 생명인 하느님 말씀에로 돌아가는 회개의 길에 있다는 진리가 그것이다. 정치구조나 사회 부조리의 개혁보다 시급한 것은 병든 말의 회복이요, 각자가 하느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예언자는 외치고 있다.
예언자는 온전한 마음으로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이 근원적인 회개를 「마음의 할례」라 하며 어떤 외적 개혁보다 중요시했다.
예언자는 강한 소명을 받고 대예언자로 불리웠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는 고생이 컸고 불행했다. 하느님 말씀 때문에 최후까지 고통스러워했던 예레미아는 이사야 53장의「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수난의 예수를 예표한다. 그의 고통으로 점철된 생애 자체가 바로 십자가의 메시지였다. 예레미아의 예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계약은 매일 미사성제에서 새로이 계속되고 있다.
신약성서의 명칭이 되기까지한 이 새로운 계약에 관한 예언은 예레미아서에서 희망의 정점으로 이스라엘의 복구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민족과 국가를 파멸시키는 정치ㆍ군사적 사건 안에서 인간의 거만과 죄악을 쳐부수는 야훼 하느님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심판의 예언 뒤에 숨은 구원의 메시지가 이 예언서의 근본사상이다. 새로운 계약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용서가 전제되고 인간의 참회가 뒤따른다. 예레미아는 이를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지난날의 불충과 배신을 뉘우치며 자비를 빈다는 전제하에「내가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아서31.34)라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예레미아서(31.31~33)는 새 계약에 대해「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새 계약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응답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새 계약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하느님 백성의 사랑의 공동체를 낳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함께 구원을 받는 교회를 예표한다. 이제 에제키엘의 마른 뼈 환시(에제키엘36)가 현실로 이루어지는 때가 온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나 자신의 절망적인 죽음의 상태, 우리 가정의 죽음, 우리나라와 민족의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키는 것은 오직 하느님 능력의 말씀뿐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예언자를 부르시고 그의 말씀에 능력을 주시며 참 생명을 부여한 살아계신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이 우리가 처한 현재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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