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신비성
이 우주는 여러 가지 신비로 가득차 있다. 이 지구가 공중에 둥 떠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벌써 지구의 존재 현실도 신비한 것이다.
그 갖가지 신비 중에 더 신비스러운 것은 생명의 신비이다. 오늘 아침에 내가 먹은 밥이 위장에 들어가 소화가 되어 살과 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나는 분명히 신비의 주인공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냐!
내 생명의 신비성!
이것은 어떤 과학이 답변할 수 없는 초월적인 내용이다. 인간의 능력이나 지식으로는 생명의 신비성에 대해서는 무지뿐이다.
TV만드는 공장이 있고 자동차 만드는 공장이 있고 로켓트 만드는 공장은 있지마는 귤 만들어내는 공장은 없다. 사과 만드는 공장도 없고 우리가 매일 먹는 생활필수품인 쌀 만드는 공장도, 오징어 만드는 공장도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한포기의 풀이 생명체라고 했을 때 전 세계 과학자가 다 모여도 그 원리를 설명하지 못 한다. 한 마리의 금붕어, 이것은 너무나도 귀한 생명이다. 더더구나 나의 생명은 이 우주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신비의 생명은 신비의 세계를 부른다. 그래서 생명의 신비를 보는 사람은 신비의 세계를 본다. 그래서 생명의 존엄성을 느낀다.
선진 문화민족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생명의 존엄성이 살아있고 정신적으로 후진 민족, 다시 말해서 생명의 신비를 모르는 민족은 미개 민족이다.
문화민족이 가진 생명의 신비성을 교훈하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내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이다. 우연히 알게 된 프랑스의 한가정이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리옹 근방에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초청으로 성탄방학을 한 주일간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 집은 시내에서 떨어진 산 속에 있었고 집 뒤에는 큰 산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온통 흰 눈이 산을 뒤덮고 있었다.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여느때 같지 않게 식당에는 커피도 빵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 집 아주머님도 집에 없었다.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눈길을 밟으며 뒷산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물었다 『아주머님 이른 아침부터 무슨 급한 일이 생겼읍니까?』 했더니 얼굴에 기쁜 미소를 지으면서 『오늘 아침 일어나니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우리 집 뒷산에 살고 있는 토끼들이, 그리고 참새들이 아침거리가 없을 것 같아서 빵부스러기를 던져주고 오는 길입니다』
나는 이 말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아주 자연스럽게 새벽에 참새 밥을 주고 오는 그들의 정신의식! 나는 이 사건을 통해서 진실로 문화민족이 갖고 있는 생명의 신비성을 생활 속에서 느껴볼 수 있었다. 눈이 오면 토끼사냥을 가고 새 틀을 놓고 새를 잡으려는 우리 민족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정신구조!
이것이 정신문화의 차이점이고 선진과 후진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내 생명이 귀하다면 한 마리의 참새도 너무나 귀한 것이다.
「자연보호 캠페인」이라는 슬로건을 가끔 보는데 그 자연은 신비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 자연 속에서 뭇 생명들이 성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신비를 통한 신비의 차원이 없이「자연보호」는 있을 수 없다.
한 마리 밖에 없던「반달곰」이 죽었다며는 그 반달곰은 영원히 영원히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 생명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고 창조주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신비성」에 대한 답변이 곧 종교이다. 그러므로 종교 없이는 내 것이 어떻게 결실 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답변 즉 실존의 의미를 답변하는 것이 곧 종교이다.
어느 과학자도 인간생명의 기원이든지 생명의 원리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간 생명의 신비성을 근원적으로 해답을 하고 드디어는 인간을 신비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그래서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는「종교는 완전한 이를 알고 신비한 이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프랑스 사상가 레옹 블롸(Leon Bloy)는 이렇게 말했다.「사람은 빵이 없어도 살 수 있다. 술도 집도 사랑도 행복이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신비가 없이는 살 수 없다」「내가 숨을 쉬고 살아있다. 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신비에 대한 답변이 없다면 의미 없는 내 생명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있고 해답이 없는 그 상황은 마냥 불안하다. 의미상실이다.
생명의 신비를 터득하게 되면 그 생명이 갖는 결실의 의미까지 밝혀진다.「모든 생명은 결실을 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열리고 대추나무에서는 대추가 열린다. 소는 죽어서 우리에게「불고기감」을 준다. 그런데 진정「나는?」「무엇을 위해서?」여기에 내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중요한 삶의 과제가 생긴다. 결실이 없는 생명은 불모의 생명이다. 이것은 생명으로서의 가치상실이다. 사과나무가 20년이 되어도 사과가 열리지 않는다면 그 사과나무는 존재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잘라버린다. 이렇게 의미가 밝혀지지 않는 생명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우리는 극히 상식적으로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딸 줄 안다면 내 생명에서는 무엇을 따야 하겠는가? 나는 왜 사느냐? 내 생명이 가진 근원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이 자기 존재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있어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의 이성적인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야한다. 그러나 이성의 능력으로는 신비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 신비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 신비의 긍정, 그 신비가 주는 의미의 수용, 이것이 곧 종교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차원이 없다면 하나의 생명도 답변이 없고 내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해명도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종교가 내 생활 속에 뿌리박고 있을뿐만 아니라 가장 귀한 내 생명의 신비성을 답변해주는 것이라면 종교없는 삶이란 끝내 의미없는 인생으로 끝날 것이고 드디어는 결실이 없는 불모의 생명으로「허무」와 「부조리」「무의미」의 종장밖에 더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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