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5학년생인 영석이가 해준 말을 기억한다.
『안 들키면 그냥 갖어요. 들킬 땐 장난인 것처럼 해요. 』
짝궁이 자리를 빈 틈을 타고, 연필이나 지우개 등 하찮은 학용품을 슬쩍해 본 경험을 이렇게 얘기했다. 그때 영석이의 얼굴이 어쩌면 저렇게도 순진무구할까하는 생각에 나 자신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영석이는 화장대에 놓여있는 어머니의 지갑에서 잔돈을 꺼내는 재미를 알았다. 시장 골목에 있는 전자 오락실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동생도 형도 없는 심심하기만 한 집에서 숙제나 하고 있었던 전의 생활과는 아주 달라지기 시작했다.
영석이의 도벽은 드디어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에도 손을 댔다.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공부를 안하니 성적이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집에만 들어오면 눈치를 보는 영석이를 꾸짖기만 했다. 슬슬 피하고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영석이 어머니는 야단만 쳤다. 이때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은 새마을 금고에 넣던 적금이 고스란히 밀려 있고, 친구들에게도 돈을 빌려썼다는 것이었다.
영석이 어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닦아냈다. 방에 가두고 때렸다고 했다. 그러나 골백번도 더 다짐한 영석이가 요즘도 도벽을 버리지 못한 걸 알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같이 레지오 활동하는 한 자매로부터 가톨릭사회복지회 청소년 상담실을 소개받고 찾아왔던 것이다.
주일에 어머니가 주신 돈을 미사 예물함에 넣는척만하고 그대로 손안에 꼭쥐고 나온 적도 있다고 했다. 외아들 영석이의 못된 버릇 때문에 이 아름답고 젊은 엄마는 사는 재미가 없다고 했다. 자주 때리는 어머니를 피해서 영석이는 밖으로만 돌았다.
두번째 만나서 영석이 어머니와 나는 몇가지 약속을 했다. 첫째로 절대로 아이를 때리지 말 것. 때리고 나서 마음이 아파서 같이 붙들고 통곡을 하는 일이 습관처럼 되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용돈을 넉넉하게 줄 것. 그리고 그돈의 용도에 대해서는 관대 할 것. 그리고 영석이가 좋아하는 오락실에 대해서는 영석이와 타협할 것. 예를 들면 하루에 몇 시간을 간다든가, 숙제를 해놓고 간다든가 하는 규정을 두사람 모자간 정하라는 것이다. 약속을 지키면 오락실을 허락한다는 조건을 내놓으라고 했다. 몇차례 더 만나고 나서 그후 영석이 어머니에게 좀 힘이 들지만 또 한가지 약속을 해야만 된다는 걸 강조했다. 어머니 자신이 스스로 외출을 삼가야한다고 말했다. 교회에서 레지오활동도 좋고 봉사하는 훌륭한 일도 보람되지만, 냉장고 안에 사다둔 갖가지 맛있는 먹을거리보다는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 한번, 손길 한번이 더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영석이 어머니도 이런 말들을 처음 듣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영석이의 비행을 고치려는 그 마음이 이런 외람된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본다.
『선생님 제가 늘 집에 있고 아이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잘 보살피면 그 병이 나을까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웃을 수 있을까? 나와 만나는 날엔 영석이의 일기를 가져 왔다. 그리고 약속대로 영석이도 데리고 왔던 것이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은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받고 빌리거나 얻거나 해야한다는 걸 어머니들은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장난인 것처럼 가장하면서 훔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 것과 남의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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