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증인이 되는 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I 고린토15,14이하).
나자렛의 예수는 누구인가? 종교창시자? 철학자 또는 사회개혁가인가? 자신이「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현재 우리의 역사적 지식으로 봐서 나자렛의 예수가 그 당시 실제로 살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제한다해도 그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란의 가능성이 있다. 예수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킬 수도 있고 세계사의 다른 위인들과 같은 한 사람으로 보거나 또는 아주 출중한 인물로 볼 수도 있다. 이 모든 의견들은 결국 예수의 일생에 관한 유일한 원천인 복음성경 주위에 맴돌게 된다.
『그분은 좋은일을 많이하셨다』
예수의 일생을 복음성경에서 묘사한대로 살펴보면 한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즉 예수가 어째서 사람들한테 그 많은 거부감과 증오를 받게 되었는가? 그래서 결국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마르꼬7, 37) 하고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았던가! 또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자기가 나자렛 예수의 생애의 증인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분은 두루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사도 10, 38) 하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반대하도록 만들었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그를 처단한 것은 그가 정치적 불안을 유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예수는 자신이 정치적 싸움에 말려들기를 꺼려했다. 사람들이 그를 싫어한 이유 가운데는 자기들이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오던 전통들을 예수가 공격한 사실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안식일은 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이 안식일 계명을 격하시켰다. 그는 죄인들이나 세리들과도 어울렸다. 그러나 이것이 열심한 유태인들에게는 스켄들이라며 흥분하도록 만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아마도 예수가 당시 열심한 사람들의 기대에 실망을 안겨주었기때문일 것이다.
유태인들은 비참한 생활과 억압을 걷어치우고 지상의 평화와 복지의 나라를 세워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외에도 이 메시아는 죄악을 끝장냄으로써 사람들이 더이상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해주어야했다. 죄인들은 이 메시아 왕국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예수는 세상의 죄를 없애겠다는 의욕은 갖고 왔으나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기도 했다. 또 그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은 이 지상의 행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곤궁과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때문에 오늘의 우리 신자들 가운데는 의기소침하여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짓고 있는 종사나 사업 그리고 내 가정에서 양심없이 설치는 다른 비신자들보다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하고 묻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산상설교가 이 세상의 정치적 평화를 위해 하나의 처방이 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즉 자기를 때리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더 이상 자기를 때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물론 인간적으로 봐서 그렇게 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산상설교는 그 상대방이 내가 참는다고 해서 정말 자기태도를 바꿀 것이라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그리도교 신자인 우리들이 이 지상의 행복과 평화, 정의실현을 위해 힘쓰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복음은 단지 이를 위해 아무 처방을 내리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복음은 우리가 노력하는 이 지상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은 채 우리가 사랑을 위해 헌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복음의 요구를 이행할 수 있을까? 』
『우리는 한분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고 하는 신앙고백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다. 이 고백은 사방에 빛을 비추어주며 다른 신앙고백들에게 그 위치를 정해주는 중심점이다. 원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가 신앙고백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이 보낸 그리스도이며 성령으로 축성된 메시아이며 그 분안에 구약의 희망이 실현되고 하느님은 그 분 안에 자기가 한 약속을 실행한 세상의 구원자이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행전 4, 12). 우리를 구원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이 소식과, 인류는 그분에게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복음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크나큰 요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미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리석고 기분 나쁜 일(예, I 고린토 1, 18~20)임을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특히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이 복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성경시대 이후 2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의 지적 수준과 안목이 대단히 넓어진 것은 의심할 바 없고 현대인들은 예수가 탄생하기 이전의 인류의 진화과정도 더 잘 알고 있다. 또 그리스도교 이전의 고대의 다양한 종교들과 높은 수준의 문화들도 배워 알고 있다. 그외에도 우리나라처럼 최근에 와서야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와 접촉하게 된 경우와 그리스도교 복음이 거의 전달되지 않은 거대한 문화대륙도 있다.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앞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교 신자이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는 요청은 약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세상 마칠 때까지」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랑의 실천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오로지 그분한테서 또 그분께로 향해 사는 사람이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다. 생각, 원의, 그리고 행동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아서 그분과 친교를 나누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란 하느님이 약속한 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믿고 모든 일을 그분과 함께 바라보는 사람아다. 그리스도교는 그래서 우선적으로 교리나 계명, 단체나 구조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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