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빌렘 신부가 주교의명을 어기고 안중근에게 성사를 주러간 일로 인해 교회 내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마침내는 빌렘 신부가 본국으로 추방되는 불상사까지 초래했다.
안중근은 자신을 방문한 동생들을 통해 빌렘 신부를 보내 성사를 받게 해 주도록 뮈텔 주교에게 요청했었다. 한편 여순의 법원에서도 빌렘 신부에게 안중근과의 면접을 정식으로 허가한다는 내용의 서신과 전보를 교회당국에 여러 번 보냈으며 빌렘 신부 자신도 주교에게 여순에 갈 허락을 여러 번 간청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된 것을 우려한 나머지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의 여순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안중근이 철회한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신부를 보낼 수 없다고 고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렘 신부는 여순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한 배경은 이러했다. 안중근의 정치적 음모에 대해 자신이나 한국교회는 혐의 받을 일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안중근이 3년 전에 한국을 떠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재판을 통해 비로소 그간의 일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아관파천을 권하거나 국가기밀문서를 숨겨주면서 반일적인 행동을 한일이 없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혐의를 받을 일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
또 교회 입장에서 보아도 안중근이 사형성고를 받은 마당에서 그를 사랑으로 대해야하고, 따라서 그에게 성사를 주거나 안주거나 하는 것이 정치와 관련될 수 없으며 교회로서는 늘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만 이행하면 그뿐이라고 했다.
안중근은 천주교인임을 고백했다. 물론 그의 행위는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용납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안중근의 행위가 도무지 정당화될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안중근이 이토를 암살한 후 한국인은 물론이요 러시아인과 중국인들까지도 손뼉을 쳤다. 일본인들마저도 도리어 그런 용기와 애국심을 일본인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안중근이 암살을 감행한 것은 그의 말대로 조선 문제가 국제적으로 등한시 되어 있어서 주의를 환기시키려했을 뿐이다. 실제로 극동문제에 능통한 사람들은 독일군이 알사스ㆍ로렌지방에서 철수한 것처럼 일본이 중국이나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고서는 동양평화가 해결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빌렘 신부는 자신도 같은 의견이라고 하며 이런 판단에서 그는 뮈텔 주교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순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빌렘 신부가 여순으로 가서 안중근에게 고해와 성체성사를 주고 돌아오자 뮈텔 주교는 그에게 주교의 명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개월간의 성무집행 정지령을 내렸다. (1910년 3월말) 한편 빌렘 신부는 교구장의 이와 같은 처사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도록 파리본부의 신학교 지도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신학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권한 밖의 일이라고 하며 책임을 회피했다.(1910년7~9월) 그러자 빌렘 신부는 교황청 포교성성에 호소했다.(1911~1912)
포교성성에서는 1913년 7월에 뮈텔주교에게 회답을 보내고「당신이 빌렘 신부에게 여순에 갈 허락을 거절한 것이나 또 그 사제에게 성무집행정지를 내린 처사는 공정을 기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는 유권적인 해석을 내렸다. 말하자면 교구장의 패소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간 교구장과 빌렘 신부 사이의 불편했던 관계는 로마의 회답이 있은 후 일층 악화되었다. 한때 자진해서 한국 포교지를 떠나기로 결심했던 빌렘신부는 로마로부터 회답이 있은 후 임시 본국휴가를 교구장에게 요청했다. 교구장은 이청을 선교사들로 하여금 투표로 결정하게 했는데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빌렘 신부의 본국휴가를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서울교구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빌렘 신부가 교구장을 거스려 로마에 호소한 방약무인한 행동을 일제히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당시 부주교인 두세(Doucet)신부는 빌렘 신부를 속죄케 하고 또 교구의 평화를 위해 그를 완전히 추방해야한다는 판단아래 교구장 모르게 교구 내 모든 선교사들에게 연판장을 돌렸다(1914년 2월). 결과는 2명의 기권을 제외하면 모두가 빌렘 신부는 한국인 신부와 교우들에게 준 스캔들을 생각할 때 추방되어 마땅하다고 동의했다. 이러한 결과를 교구장으로부터 통고받은 빌렘 신부는 1914년 4월 22일 30년 가까이 봉사하며 정든 한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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