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불안감이 감도는 가운데 2월 초사흗날 나는 공민증을 뺏기고 말았다. 이 일은 앞뒤 정황을 미뤄볼 때 내 신변에 닥친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항간에선「공민증을 뺏기면 사람노릇 다한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이틀 후인 2월 5일 밤 9시쯤 얼굴을 모르는 두남자가 나에게 불쑥 찾아왔다. 좋은 라디오를 가지고 있던 교우회장이 와서 이남관계소식을 전해주고 집으로 돌아간 직후였다. 누군가가 안방 문을 열더니『구천우씨계십니까』하며『저는 덕원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덕원」이라는 말을 듣자 문득 수도원이 떠올라서 혹시 수사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수사가 아니었다. 그는『저희 집으로 갑시다. 소리치면 안됩니다』라고 은근히 힘주어 말했다. 나는 속으로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수단위에 그래도 오바를 걸친 채 그들을 따라 나섰다. 그날 밤은 정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그들이 데리고 간 곳은 내무서였다. 알고 본즉 대문밖에 서있던 남자는「신촌내무서 정치보위부 책임자」였고 덕원에서 왔다는 사람은「해주 내무서의 취조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주서원은 나에게 꼭「신부님」이라는 존칭을 붙여서 부르는 것이 틀림없이 교우 같다라는 느낌을 던져주었다. 그들은 나를 뒷문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 내무서는 왜정 때는 경찰서로 쓰였는데 여러 사람을 취조할 수 있도록 방을 여러개 만들어 놓았고 그 앞에는 문을 달아 놓았다. 해주내무서원은 나를 앞세우고 걷다가 안쪽으로 문이 달려있지 않은 작은방 앞에 이르르자 잠시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발을 들여놓으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벽에 한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아두었다. 내무서는 벽돌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정로로 큰 구멍이 뚫릴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내 앞에 바짝 서더니 잡혀온 이유를 아는냐고 물었고, 모른다고 했더니『차라리 모르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구멍을 단단히 마음을 새기고 3층으로 올라갔다. 턱 올라갔더니 방한가운데는 몸을 데우기 위해 화덕이 놓여있었고 그 옆으로 해주 내무서원과 신천내무서원이 함께 앉았다. 그들은『신부님은 교인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말해야한다』고 강조하면서『반동적인 행동을 한 기억이 나지 않느냐』『이남으로 내려 보낸 중학생 아이들의 이름을 대라』는 황당한 질문을 계속 퍼부었다.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얘기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소지품 조사를 했지만 나온 것은 열쇠 2개(방ㆍ식당)와 손수건ㆍ묵주하나 그뿐이었다. 나중에는 혁대고리까지도 조사를 하더니 지쳤다는 듯이 나 혼자 남겨두고는 모두들 나가버렸다. 그다음에는 어깨에 견장을 단 내무서장이 들어와『신천읍안에 불온선전물이 돌았는데 그 이유를 아느냐』고 따져 물었다. 내가 모른다고 하자, 그는『신부 방에 가면 과학적증거가 드러나는데 왜 모르느냐』하며 소리를 질렀다. 나도 이에 질세라『나는 천주교신부요. 양심대로 대답할 뿐이다. 도대체 그 과학적증거가 무엇인지 내 눈앞에 가져다놓고 말을 하라. 이게 무슨 수작이냐』고 되받아쳤다. 얼마 전에 문제가 된 등사기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았지만 가져올 때 당당하게 나가야할 것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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