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이 종교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특수한 존재양식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특수한 존재상황을 철학에서는「실존」이라고 한다.
「실존」이란 말은 『자기 자신이 자신의 존재의미를 깨달아서 그 의미에 따라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성숙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특수한 존재상활』을 뜻한다. 「실존」의 의미를 쉽게 알기위해서 동물의 존재상황과 비교해 보자.
초겨울이 오면 개는 털갈이를 해서 겨울을 극복해나간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추위가 와도 몸에서 새 털이 나지 않는다. 이점으로 보아서는 개보다 못하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겨울이 무엇인지 알고 방에 불을 넣고 쉐터를 입고서 겨울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겨울 추위가 무엇인지 전연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그는 영하 20도의 겨울추위에 여름옷을 입고 나갔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얼어죽고 말 것이다. 그 「죽음」은 겨울이 무엇인지 추위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책임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매순간 모든 행위를 할 땐 그 의미를 갖고 행동한다. 손가락 한개 움직일지라도 그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내가 왜 존재하느냐?』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그는 의미없는 삶이되고 말 것이고 자신의 성숙에 있어서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는 삶이 되어버린다.
추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얼어죽기 알맞듯이 존재의 의미를 모르는 그는 살아있어도 정신적으로는 죽은 삶이다.
이런 전제를 갖고 우리는 내 실존의 근본상황을 고찰해야 한다.
내 意思와 관계없이 태어난 「나」
첫번째로 나는 내 존재가 나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대전제를 알아야한다. 이 우주에서 나에게 있어서는 제일 귀중한 내 존재가 나의 자유 동의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기후나 조건이 있었다면 나는 오늘 이런 꼬락서니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계 일등 국민으로 태어났을테고 궁중에서 왕자로, 아니면 궁녀로, 그리고 인물은 최고의 미인으로, IQ는 500이상으로 태어났을 텐데「나에겐 물어보지도 않고」주어진 나의 존재라는 이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첫번째의 전제는「나는 삶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삶의 피조물」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밥 세 그릇에 얽매이는 종속적인 존재인 인간
두번째, 나는 모든 것을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성은 언제나 종속성을 동반하고 있다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야한다. 우리 모두가 하루 24시간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라. 무수히 많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그 무수히 많은 것과 내 자신과의 종속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인간의 종속성을 말한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들자면 세상의 어떤 영웅 호걸도 자신이 하루 24시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밥 세그릇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밥그릇 세 개에 내 자신을 종속시키지 않고는 나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극히 종속적인 존재임을 깨달아야한다. 매순간 우리는 공기라는 자연이 없이는 호흡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두번째 전제는「나는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종속적인 존재」이다.
죽음 앞에 안죽을 자유없는 운명론적 인간
세번째, 인간은 매사에 모든 행동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행동한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 본성의 강한 내용이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한다. 우리의 자유로써만이 만사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유가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운명의 상황이 있다는 우리의 현실을 올바로 알아야한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본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음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 죽음의 운명 앞에 「안 죽을 자유」가 있는가? 죽음이란 운명 앞에 인간의 자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한다. 자유는 극히 제한된 것이다.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세 번째의 전제는「나는 자유인이면서 동시에 운명론적인 존재」이다.
이상 세 가지는 내 존재와 직결되는 객관적인 존재상황이다. 요약하면,
생명의 주체성과 피조물성 독립성과 종속성 자유와 운명
이 두 가지 상황에서 우리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이런 실존의 상황에서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쎌(Gabriel Marcel)은 이렇게 표현한다.
상대적인「나」는 절대적인「너」찾아야 완전
주체성과 독립성, 그리고 자유를「나」라고 표현하고 피조물성, 종속성과 운명은「너」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철학자 마르쎌에 의하면 인간「나」는「너」와의 관계이다
내 생명은 이것을 준「너」가 있어야 하고 내가 갖고 있는 상대적인 독립성이 영원한 하나의 독립성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궁극적으로 종속돼야하는 절대적인 종속의 대상인「너」가 있어야하고 내 자유로서는 도무지 이룰 수 없는 내 운명을 지배하는「너」가 있어야 한다.
내 삶의 의미를 밝힐「너」가 없으면 내 삶은 의미상실이고, 내가 마지막으로 종속되어야 할「너」가 없다면 나는 언제나 상대성을 면할 수 없고 내 자유로 이룰 수 없는 죽음과 삶의 운명을 준「너」가 없이는 내 죽음의 운명에 대해선 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마르쎌의 사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나」는「너」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었고「너」없는「나」는 왜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답변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철학적인 어려운 표현을 떠나서 매일의 삶속에서「너」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배가 고픈「나」는 밥이라는「너」가 있어야하고 배가 아픈「나」는 약이라는「너」가 있어야 하고 병이 난「나」는 의사라는「너」가 있어야 한다면, 이제 궁극적인 문제인 영원히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나」는 어떤「너」가 있어야 하겠는가?
여기서 그「너」가 없다면「나」는「의미없는 나」「목적 잃은 나」「허탈한 나」「부조리한 나」 이것밖에 더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철학자들은 영원한 삶의 갈증을 채워줄「너」를 찾는 삶이 곧 종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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