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같은 사명은 자기에게 사로잡혀 있지 사람에 의해서만이, 그들 자신의 마음을 열어서 자기네 직무, 고통 받고 괴로움에 싸인 이 세계의 가난한 이들 곤핍한 이들에게 활동의 초점을 맞출 줄 아는 사람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브류그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이 다른이의 발을 씻어줌에 있어서 행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종은 발이 씻겨 지는 사람이 주인의 위치에 자리 잡게 하는 가운데 자신은 수하의 자리를 취한다. 여기서 만일 주인의 자리에 앉혀진 자가 바로 사회에서 내쳐지고 배제되어 왔던 인물이라면 이점은 특히 중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들 무가치하고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자각마저 졸아붙을 때까지 공동체 내에서 억눌리고 또 억눌린다. 사람들은 거부당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강력하게 또한 필경 미묘하게 배제당할 수 있어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무가치하고 열등하다고, 혹은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몸이라고 인식하게 될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백성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은 예수께서 보이신 방식에 따른 활동이요 섬김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사회로부터 무시당하고 억눌리는 바로 그들이 높이 들어 올려져서 구속(救贖)된 인간 조건ㆍ상태에 본질적인 존엄과 가치에 대한 저 자각에 이를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즉, 사회에서 배제당하는 이들은 교회에 의해 포용되어야하는 이들인 것이다. 그러나 사심 없이 직무를 실행할 수 있는 교회만이 세속적 능력이라든가 세상에서의 성취에 입각하여 자체를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교회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을 이해한 상황이 성찬에서 빵을 쪼개는 맥락에서 가난하고 곤핍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천명되고 있는 사도행전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사도2, 42ㆍ44ㆍ45).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성찬거행과 사회적 실천의 연계를 드러내주는 가장 중요한 예는 바울로에 의해 1고린토 11장에서 제시된다.
요즘의 주요 논점은 성찬 제의라든가 그것이 띠는 형태와 관련한 문제가 아니다. 성찬의 비전과 목표, 그것의 실천과 더불어서 그 성찬을 거행하는 공동체의 본질이 논점이 되고 있다. 현재 세계가 당면한 커다란 불의의 스캔들은 아마도 수많은 인간들이 처한 가난과 지저분한 환경, 인간으로서의 품위 저락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이와 같은 스캔들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불의의 구조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라면, 혹 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들은 결국 악에 결탁하는 것인데, 그들은 반드시 회심하여 개인적인형태로도 구조적인 형태로도 죄에 맞설 여러 방법을 모색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성찬 거행은 위선이다. 성찬은『그리스도의「실제적인 현존」에 내포된 생동력과 희망, 창조적비전과 에너지, 이런 것들의 원천을 이룰 수가 없다…교회가 실제로 그 삶에 있어서 언제나 고통당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은 말이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찬 거행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중간노선이란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어떤」효력 없이는 재연될 수가 없는 것이고, 바로 이점이 ex opere operato(성찬 거행에서「저절로 효력이 이루어진다」)에 관한 가톨릭교리가 뜻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참회와 회개에로 죄인들을 부름에 대한 비판적인 증거를 구성하고 있고, 상투적인 경건자에 맞갖지도 않고 개인적으로 성체를 영하는 자에게 향해 있지도 않은 희생적 자기-비움을 선포하는 것으로서, 교회라는 존재를 깊이 버려둘 쌍날검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소유주가 아니라 그 관리자다.
행하시는 분은 언제나 그리스도이시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권능이 풀려진다.
그것은 교회가 전혀 제어할 수 없는 그런 권능이다.
그분의 현존은 역동적이고 변화를 일으킨다. 성찬을 거행하는 공동체가 그분의 몸으로서 꼴을 갖추게 하는 것, 그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이공동체가 여기서 지금 말과 행함으로써 세계에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니시고 그분은 주님으로서 거기에 계시는 것이다.
성찬의 일치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치, 그리고 인류의 일치 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2차 바티깐공의회의 교회헌장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標識)ㆍ성사요 도구이다』성찬은 교회의 일치를 길러주나 교회는 세계의 일치를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와 성찬둘다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왕국을 세우고자 애쓰시면서 가르침으로만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삶과 실천으로 기분이 우리에게 해주신 약속과 희망의 비전에 바탕 해 있다. 인류의 일치를 등한히 하거나 사회의 한계층을 다른 계층에 대치시킴으로써 저 일치를 무너뜨리는 식의 정의를 위한 노고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라고 일컬어질 수 없다.
이와 똑 같은 맥락에서 세계의 곤경을 간과하는 식으로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그 어떤 노고라도 그것은 결코 예수의 전통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성찬은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를 매개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를 일으켜 세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회에다가 세계 내에서 정의를 위하여 자유를 가져다주는 행동을 취할 윤리적 책임을 내포하는 사명으로서의 과제를 부과한다.
성찬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정의로운 삶에 뿌리내리게 하며,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는 물론 서로들 역시 하나가 될 그런 미래로 들어서게끔 하기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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