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후에는「다섯 놈」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정말 매를 맞아야 바른 말을 하겠느냐』며 으름장을 놓았다. 한편에서는 내내 나를 따라 다니며 못살게 굴던 내무서원이 그간에 시시콜콜 하게「싸운 얘기」를 들먹거리며 따지고 들었다. 나는 화가 나서『정치적 문제는 신부의 신분으로 내가 간섭할 바가 아니다. 지금 그 원한을 풀겠다는 수작인가』라며 그를 답세웠다. 송화에서 왔다는 내무서원은 송화의 오 신부를 지적하며『그 신부처럼 잠자코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반동을 했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12시를 알리는 싸이렌이 불었다. 9시에 잡혀왔으니 어느새 3시간이 지난 것이다.
자정을 기점으로 다들 밖으로 나가고 1명만이 화덕 옆에서 나를 지키고 있었다. 불안한 상황을 앞에 두고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사도행전」중 베드로종도가 감옥 안에서 하느님께 바치던 기도를 생각하면서 그 은혜를 나에게도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불현듯『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달아나야 겠다』는 결심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기회는 막연하게만 보였다. 『저놈의 콧잔등이를 석탄 쇠꼬창이로 냅다 내려치고 탈출을 할까』라는 생각도 떠올랐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마땅치 않은 행동」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화덕 옆에서 졸고 있던 사람이 소변을 보기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소변을 빌미로 달아나야겠다는 꾀가 떠올랐다. 그 사람은 나갔다 오더니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1시간쯤 지나 그 사람이 완전히 잠든 것이 확인되자 나는 어깨를 툭 치면서 소변을 보고 오겠다는 말을 넌지시 던지고 문가로 다가갔다. 밖에 서서 소변을 보는데 순간 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왜 그렇게 서 있느냐』방안을 보니 그 사람은 고개를 박고 잠들어 있었다. 단숨에 아래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벽에 구멍이 뚫린 방을 지나쳐 앞문으로 달려갔지만 문은 잠긴 채였다. 사람소리만「바스락」들려도 곧 죽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왜 겁을 먹고 있느냐 허락을 받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어디선가 울려오는 그 소리에 마음을 담대히 먹었다. 다시 그 구멍 있는 방으로 돌아와 구멍 속에 손을 내밀고 휘저으며 그대로 기어나갔다.
별빛 하나 없이 캄캄한 밤이었다. 거의 기다시피하면서 벽을 따라 더듬어나갔다. 웬 개가 한 마리 나타나 나를 보고 짖어댔다.
그 개소리에 사람이 뒤쫓을 것만 같아서 내리막길을 그저 마구 달렷다. 얼마나 심정이 절박했던지 가시덤불에 찔리고 바닥에 뒹굴면서도「아프다」라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시간은 새벽 2시쯤 됐을까 멀리서 전기 등불이 켜있는 훤한 길이 보였다.
어디로 가야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잡히고 뭐고 학생들에게 일러준 길로 그대로 갈까 아니면 38선은 좀 멀리 떨어져있지만 재령 땅의 여동생 집으로 가야할까』 갑자기 어머니에게 아무 말 없이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일단은 입은 옷 그대로 회장 집으로 가서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거취를 정하기로 했다. 성당 근처에 있는 최 회장 집으로 가서『최 회장』하고 소리를 질렀다. 3차례나 냅따 소리를 질렀는데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고 집에서 기르는 개 3마리만 동시에 짖어대기 시작했다.
회장 바로 옆집은 그 마을에서도 유명한「공산주의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의 도주사실이 알려졌는지 마을 전체에 비상「사이렌」소리가 점점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동요되는 마음을 억누른 채 1백촉짜리 전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국민학교 운동장을 가로 질러 뛰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운동장을 가로 지른다는 것은 위험천만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운동장을 넘어 결사적으로 달린 덕택에 재빨리 읍을 벗어 날 수 있었다. 사이렌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저 멀리 신작로가 어렴풋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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