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생명의 경시풍조가 날로 만연해져 가고 있는 가운데 서울 사당동본당 주임 유봉준 신부(윤리신학 박사)는 가톨릭대학 논문집 제12집에서「인공수정 및 시험관 아기에 관한 윤리 신학적 고찰」을 발표, 생명 조작적 기술 등의 비윤리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유 신부는 인공 수정 및 시험관 아기의 윤리적 문제를 살펴봄으로써 교회가 이를 강력히 단죄하고 있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본보는 유신부의 논문 전문을 수차례에 걸쳐 소개, 신자들에게 인간 존엄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자 한다.
人間의 生命
우리는 아기를 원하는 無子女夫婦(이들은 합법적으로 혼인한 부부를 말한다)들이 인공적 생식기술을 통해서라도 아기를 갖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으며, 또한 불임해결을 위해 연구하는 의학연구팀이 그들 나름대로 무자녀 부부들의 요청에 부딪치고 있다는 사실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인공수정이나 체외수정을 통한 시험관아기(Test Tube Baby)의 탄생같은 생식 의학기술이 설사 『혼인을 유지하기 위하여』 혹은 『자신들의 아기를 갖기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이며 합법적인 부부의 부모권(Parental authority)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다. 왜냐하면 인공수정이나 체외수정에 의해 아기를 탄생하게 하는 것은, 자연적인 성적결합(Sexual intercourse)에 의한 아기와 「똑같은 지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부모의 자연적인 성적결합으로 인해 탄생한 아기와 그 부모와의 관계(relationship)는 동일하지만 인공수정이나 체외수정으로 인해 탄생한 아기는 엄밀히 말해 인간 생활의 근원에 예속될 뿐이다. 그러므로 인공수정이나 체외수정을 통해 자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결국「제작된 산물」로서의 아기를 가지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더우기 이러한 출산방법이 널리 확산된다면 인간의 근본적인 품위를 파괴하는 불평등성과 심각한 지배관계가 초래될 것이다.
우리가 언뜻 지나치기 쉬운 자기 정체성(identity)문제는 우리가 태어나고 죽든 간에 불변하는 존재론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합당한 결합에 의해 산출되지 않은 아기는『나는 나의 부모간의 동등한 사랑과 계약 그리고 상호통교와 우정의 독점적인 행위 안에 나의 기원을 둔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다른 아기들의 근본적인「자기 정체성」과 「자기 이해」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부부들과 그 부부들의 의뢰를 받은 의료진들은 실상 그러한 방법들을 시행하고 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교회가 문제를 제기하고 윤리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공수정이나 체외수정과 같은 생식 의학기술을 일방적으로 긍정적인 기술로서 받아들이려는 잘못을 인식시키려는데에 있다. 사실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불안한 조작적 행위는 물론이고, 연구 실험상 생기는 많은 수정란의 파괴는 분명히 반생명적 행위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생명을 정지케 할 어떠한 권리도 없으면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죄악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좀 더 명확한 해석으로써 생명 조작적 기술들의 비윤리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가장 근본적으로 성서의 인간 생명관에서부터 출발하여 인공 수정 및 시험관 아기의 윤리적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문제 제기
인류역사를 통하여 보건데 인간을 탁월한 가치로 보는 반면에 하나의 효용가치로 간주하는 사례들이 많이 있어 왔고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외면적으로는 Humanism을 부르짖으면서도 그 실재에 있어서는 대체로 사회적 지위, 중산계층과 무산계층, 그리고 지식계층과 비지식계층간의 인격 차별 및 인격 말살 등이 끊일 새가 없다. 더우기 현대에서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태아(embryo)의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는 말할 것도 없고 자연법과 신적인 실정법을 거스려 생명의 출산을 인위적으로 조작, 변경하는 사례들이다.
자연과학적 기술의 진보와 경제적 발전, 생활 환경의 개선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인간 생명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비하면 여전히 방편에 불과한 것임을 현대 세계는 자주 간과하고 있다. 선진 국가들이 생활의 풍요와 넘치는 자신감으로 후진 국가들에게 동경과 추종을 조장하였지만,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영적가치는 선진 국가에서 점점 소멸되어 가고있는 반면에 후진 국가는 그들의 오랜 전통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가장 중요한 인간가치의 일부를 아직도 생생하게 인식하고 보전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분명히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였어도, 근본적으로는 언제나 인간생명이 신의 선물임을 그들 정신에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교회가 현재 지적하는 인간생명의 문제는 선진국에서 이미 폭넓게 실행되고 있는 인공 수정 및 체외수정에서 비롯되는 많은 윤리적 문제들이다. 불임을 완화시키려는 시도는 매우 가치있는 일이며 대중의 호응을 얻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대중을 놀라게 한 공동관심사는 섬세하고 신비롭게 창조된 인간태아의 출생과 운명을 불임완화라든가, 연구 실험의 명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정자제공(Semen donation)으로 인한 정자 냉동 은행과 대리임신(Surrogate Pregnancy)등의 상업적 매매 행위나 연구실험 과정 중의 파괴행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에 관한 교회의 우려는 정상적이든 비정상적이든간에 출생한 어린 아이의 운명에 관한 우려이며 또한 가족 구조 및 인간 세대교체의 맥락 안에서 성장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관련된 우려이다. 더우기 안타까운 문제는 출생이 예정된 존재로 성장되어 가고 있거나 혹은 사실상 현존하고 있는「새로운」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이 아기를 원하는 어른들의 관심에 임의대로 종속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태아들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인들의 인식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인공 수정 및 체외수정이 태아의 윤리적 권리를 말살하는 것으로서 최소한도「기성인들의 편리를 위한 테크닉」임을 지적하는 의미에서 인간 생명의 근본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2. 육신생명의 신학적 의미
(1) 성서에 나타난 육신 생명의 의미
구약과 신약 전체에서 볼 때 인간의 육신생명(bodily life)은 하느님의 선물로 나타나 있다. 인간의 육체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창조계에선 가장 뛰어난 걸작품으로서 이 지상에서는 번창하고 천국의 영광 가운데서는 불멸성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생명을 창조주로부터 나와서 피조물들에게 생기를 주는「힘」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 의하면 인간 개개인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창세 1.27)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기 위해 육체적 생활에로 불리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생명의 가치는 진화의 절정으로써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은 피조물이라는 것 때문에 무한하신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통교(Communio)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더우기 구약에서는 수명 장수가 큰 축복으로 간주되었다(출애 20.12: 시편 91.16: 잠언 10.27). 이러한 사상에는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여 하느님을 지성으로 섬기는 사람은 지상에서 오래 사는 만큼이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영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해 축복은 자신의 일생을 선하게 삶으로써 얻는 수명 장수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 인간은 인생을 충실하게 사는데 있어서 그 기간이 짧아도 그의 영혼이 주님의 뜻에 맞는다면 오래 산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지혜4.13).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은 몇 년을 더 살게 해주는 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의 뜻대로 짧은 생을 마친 그리스도를 닮은 데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은 단지 생명을 가진 존재나 신체적, 생물학적인 실체만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실체로서 궁극적으로「하느님의 뜻」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은 확실히 육신생명이 절대적인 선은 아니라는 입장에 있다. 즉 복음은 일생을 단지 착하게 사는 것에만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자기 육신생명을 이웃에게 봉사하는 데 사용하며 특별히 자기에게 생명을 부여해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에 그 참된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모범을 요한복음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요한복음에 있어서「생명」은 주요 개념이다. 생명은 하느님 말씀의 가장 위대한 창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이 육화하신「살아있는 몸」(요한1.14)이라는 품위를 지닌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생활 안에서 자기 이웃을 더 사랑함으로써 특별히 성부의 영광을 입는다. 그러므로 생명의 참 의미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마태 8.35: 루가 9.34: 17.32: 12.25)을 나눔으로써 자신의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있다. 이로써 인간은 지상의 순례 길에서 사랑을 위해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신적 생명의 분배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신비는 반드시 육체적 생활 안에서 완성된다.『당신은 저를 참 제물로 받으시려고 인간이 되게 하셨읍니다』(히브10.57).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 생활동안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보여줌으로써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셨으며 또 부활하심으로써 성부께 영광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들의 육신생활 안에서 생명의 가치와 품위를 존중하고 그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증거한다면, 그들의 지상생활은 끊임없는 영광의 시작이요 기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구속자로서 육화하신 말씀의 빛 안에서 우리의 이 짧은 기간 동안의 육신 생명의 큰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육신 생활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사랑과 봉사에 대한 우리의 소명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인간의 과업에 진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자기 생명이나 생활의 모든 고통과 위험을 피하려고 이기적인 방법으로 타인의 생명을 무시한다면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생의 지혜란 성취해야할 선과 거부해야 할 유혹을 잘 판단하는 것이다.
크리스찬들에게 있어서 육신 생명의 목적은 개개인에게 주어진「기회를 잘 살리도록 하는데」(에페5.16)에 있다.
또한 거룩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영원한 수확을 준비할 것이냐 아니면 죄와의 관계 속에서 최종적으로 멸망을 준비할 것이냐도 신중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고린5.10)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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