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중 어느날 혼자 병실에 들러 보았습니다. 조형제님의 자녀들이 대구에서 올라와 있었습니다. 1남2녀였습니다. 큰딸이 대학생이고 둘째딸이 고등학생이고, 아들이 중학생이었습니다. 환자인 조형제님은 저를 자원봉사자라고 소개하고 서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때 환자 조형제님은 입원했을 때보다 훨씬 병이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표정은 말없이 무거웠습니다.
「암」이라는 병이 판정되어 비록 가망은 없다지만, 대구에서 치료를 할만큼 하다가 서울로 와서 큰병원에서 치료를 하면 좀 나아질 것이라는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방학을 이용하여 서울로 아버지를 찾아 왔지만 날로 시들어 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애타는 자식들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같이 기도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할머니께서 병실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기도가 끝났습니다. 무언가 침묵이 흘렀습니다.
조형제님께서 입을 여셨읍니다. 울음섞인 음성으로 『어머님은 또 어디가서 우시고 계시겠지? 그냥 들어 오시라고 이야기 하라』고 하셨습니다. 조형제님은 자기가「암」에 걸려 이제 곧 어머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어머님께 불효를 하게되어 미안한 감을 감추질 못하는 표정이었습니다.
환자의 어머님인 할머니께서는 우리들이 와서 기도와 성가를 불러줄 때 종종 혼자 나가시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조형제님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와 있는데 조형제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무언가 뭉클한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며칠 후 저는 화요조의 최영순(유리안나)씨와 만나서 병실로 갔습니다.
그날은 우연히도 1988년 8월 8일이었습니다. 이날은 8자 4개가 겹치는 1세기에 단 한번 있는 축제의 날이라고 TV에서는 떠들어 대고 있었습니다.
이날은 저의 맏딸이 18번째 맞는 생일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생일날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바쁘지만 이러한 날일수록 봉사의 시간을 더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병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병실에 올라갔더니 환자는 안보이고 부인 혼자 계셨습니다. 부인께서는 환자가 오늘 입원한 후 처음으로 훨체어를 타고 병실 밖으로 바람쏘이러 나가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곳은 지금 호스피스 병동 바로 앞에 있는 성모님상 뒤뜰 잔디밭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첫나들이를 끝내고 병실로 돌아온 조형제님께『오늘 나들이 다녀오신 소감이 어떠세요?』라고 물었더니 너무 기쁘고 즐겁다면서 어린애같이 좋아하셨습니다. 처음으로 성모님상도 구경하였고 성당도 구경을 하셨다하시며 아주 흐뭇해 하셨습니다.
오늘은 8이란 숫자가 4개가 겹치는 행운의 날인데 의미있는 외출이라고 했더니 더더욱 즐거워하셨습니다.
사실은 바깥 세상에서 즐거운 명절이나 축제일은 병원 안이 한층 더 적적하고 외로우실 것만 같아서 일부러 방문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형제님은 감격에 넘쳐 옆에 있는 부인에게『여보! 우리도 대구에 내려가면 성당에 가서 식구 모두 성세성사를 받읍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 말씀을 이어서 『대구까지 내려가실 필요 있으십니까? 여기에도 신부님, 수녀님 다 계시니까 원하신다면 아무 때라도 성세성사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 잘 알았습니다』하시며 시종 웃음이 얼굴에 가득하셨습니다. 조그만 저희들의 정성으로 가족과 조형제님께서 이렇게 기뻐하시니 굉장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오늘은 정말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것 같아서 가슴이 뿌듯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봉사의 보람을 느껴 계속 병실을 방문하여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그러나 환자의 상태는 하루하루 점점 악화만 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감에 따라 부인께서 우리들의 방문을 지난 날과 같이 그렇게 반가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하여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우리의 병실 봉사 분위기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봉사자들이 병실에서 머무르는 시간도 짧아지고 그 정답던 대화도 없어져 갔습니다. 병실 방문도 이제는 기도하고 성가 한 곡 정도를 부르고는 금방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답게 이야기하던 부인도 말이 없어져 갔습니다. 슬픈 표정도 기쁜 표정도 없어지고 그저 우울하고 묵묵한 모습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우리 화요조가 모이는 날엔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그 병실을 빠짐없이 방문하였습니다. 점점 우울해져 가는 부인에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안타까와했습니다.
부인은 이제 우리들의 기도나 말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고 또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우리들이 병실을 방문하여「노크」를 하였을 때『지금 환자가 잠들었어요』라는 말 한마디만 하고 병실 문앞에 아무말 없이 버티고 서있곤 하였습니다. 그럴 땐 우리는 병실 문 앞에서 서로 말없이 한참동안 우두커니 쳐다만보다가 기도조차 해드리지 못하고 그냥 되돌아오곤 하였습니다.
우울하던 부인이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호스피스」봉사자들의 열렬한 기도 덕분에 하느님께서 이 환자에게 기적을 내리시어 치유를 기대했는데…』『그래서 호스피스의 봉사에 기대를 걸고 환자와 온가족이 그토록 매달려왔는데 점점 악화만 되어가니 구세주이신 주님이라기 보다는 가혹하신 주님이 아니신가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호스피스 화요조는 이 환자에 대한 봉사의 방향 감각을 잃고 안타까와 했습니다. 우선 환자의 부인이 우리의 봉사를 기피하는 듯하니 우리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어색한 분위기는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자와 가족을 위하여 계속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울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중 어느날 서로 마음의 문을 열게 된 결정적인 날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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